경희와 함께 한 영광의 반세기를 되돌아보며

경희대학교 총동문회
Kyung Hee University Alumni Association
z특집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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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와 함께 한 영광의 반세기를 되돌아보며

관리자 0 3818

사진1: 학원제 기간 중 본관 앞에서 (후면 좌측이 필자)

신용철 사학60/ 12회, 전 모교 사학과 교수, 현 동서문화로 연구실 대표)

  1960년의 화창한 4월의 봄 날, 우리 1500여명 신입생들의 대학생활이 시작되었다.  ‘경희대학교’란 이름의 첫 신입생들이었다. 봄볕이 화사한 캠퍼스에는 파릇한 숲과 학교의 꽃인 ‘목련’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독립문 같은 정문인 등용문을 들어서는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무한한 야망과 웅지로 불타고 있었다. 

첫 수업을 시작할 무렵....
  희망으로 시작한 대학생활은 그러나 첫 수업을 시작할 무렵, 한국 민주주의 정치사의 중요한 출발점인 4.19학생의거로 우리는 새로운 시대와 함께 했다.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는 도처에서 거의 매일 계속되었고 최초의 민주정권인 장면정부는 사태를 주도하기에는 너무 무능했다. 구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시대를 갈구하여 자유가 넘치는 분위기가 사회에 충만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인 1961년 5월 16일에 시작된 군사정권의 시대는 1980년을 지나도록 계속됐다. 
  몹시 더운 그 해의 여름날, 우리는 문리대의 위층에서 수업 중이었다.  졸음이 쏟아지는 오후, 강의실에서 한 학생이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폈다. “여러분. 저 밖을 내다보십시오.”라는 강의하던 교수님의 노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 그 분이 가리키는 태릉방향을 내다보았다. “저 밖의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들이 보입니까?” 영문도 모르는 우리에게, “이 뜨거운 햇볕아래에 들판에는 여러분들의 아버지나 형님뻘 되는 분들이 땀을 흘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들은 시원한 강의실에서  졸며 하품을 하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기성세대 물러가라고 외칩니까?” 우리는 정신이 버쩍 들었다. 이제야 그분의 말씀하는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우리 기성세대는 물러가지 못합니다. 여러분과 같이 무기력한 젊은이들에게 이 사회를 맡길 수는 없습니다.” 격분한 노교수의 항변이었다.
  그런데 지금 바로 그 때 기성세대의 위치에 있는 우리를 발견하고 놀란다. 그것은 벌써 47년 전의 일이었다. 이제 우리는 물러나야 할 세대가 된 것이다. 그리고 다음해의  5. 16 사태로 군사정권의 시대를 함께 했다. 대학생활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우리는 모두 교복을 입게 되었고 일제 시대의 대학생들처럼 사각모자를 썼다. 정문에는 체육대생인 규율부원들이 마치 고등학교에서처럼 교복과 모자 및 배지를 검사하고 있었다.
  많은 것이 바뀌었고 힘찬 조국의 건설이 시작되었으며, 우리는 그 대열에 앞장섰다. 뒤를 돌아 볼 여유도 없이 앞으로 뛰었다. 전국은 마치 지금의 중국처럼 건설의 공사장이었다.  우리학교도 마찬가지였다. 본관을 비롯하여 문리대, 운동장을 비롯하여 중앙도서관이 모두 건설현장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본관의 옥상위의 임시도서관을 이용했다. 비가 오면 소리가 들리고 볕이 나면 뜨거웠다. 에어컨은 고사하고 선풍기도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좋았다. 중앙도서관은 우리가 졸업한 다음해에 문을 열었다.
  나지막한 천장산(天藏山, 지금의 고황산)의 줄기에는 경종의 의릉에서부터, 명성황후의 홍릉 및 엄비의 영휘원을 비롯하여 청량리의 이름이 유래한 청량사와 시립대학 자리의 사도세자의 묘, 위생병원 자리의 휘경원 등이 있던 명당이다. 오늘날 캠퍼스에 들어서기 전 왼편으로 보이는 의료원(한방병원) 자리에는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윤씨의 묘가 있었는데, 한때 회릉(懷陵)으로 불리기도 했고, 여기에서 오늘날의 회기동이 유래했다.
  학교 뒤편의 산에는 아직 나무들이 어렸고, 지금의 정경대나 법대, 한의대 등은 물론 아직 지어지지 않았다. 특히 문리대의 위층에서 태릉 쪽을 바라보면 모두 논밭의 벌판이었다. 후문을 나서 외대로 가는 길은 봄, 여름이면 맹꽁이가 울고 개구리가 뛰는 물 논이었다. 정문 앞의 오늘날의 길들은 그때 물이 흐르는 하천이어서 방망이를 치켜들고 빨래하는 아낙네들을 볼 수 있었다.
  당시 서울시내에서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졸업사진을 찍는데 가장 인기 있었던 덕수궁 석조전 같은 본관의 석조건물 앞에서 우리는 자주 전체 학생조회를 했다. 그 때 젊고 역동적인 조영식 총장님의 말씀을 분수대 주변에 서서 자주 들었다.


전쟁의 심한 후유증을 극복하면서 도전
  당시 연간 국민 소득 100불도 안 되는 경제상황에서 우리의 대학생활도 가난 속에서 쉽지 않았다. 더구나 아직 외부세계에 대해서 많이 알지 못했기 때문에 학문에 대해서도 초보적인 수준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희망으로 가득했다. 전쟁의 심한 후유증을 극복하면서 도전에 대응하여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꿈으로 분주했다. 우리 ‘경희(慶熙)’의 이름도 바로 그러한 ‘국가의 재건과 문화의 부흥’이란 목표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우리 사학과 학생들에게는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을 찾아가는 답사가 아주 큰  기쁨이었다. 그러나 그 때는 교통상황이 아주 불편했기 때문에 버스나 기차를 이용하기도 했지만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녔다. 교통사정으로 답사의 폭은 좁았지만, 반대로 훨씬 지금보다 자세히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장점도 있었다.
  10월의 가을의 단풍으로 온통 붉게 물든 북한산의 비봉에서 진흥왕의 순수비를 탁본하고 나서 막걸리를 마시며 노래를 부르고 내려오던 사진을 보면서 다시 한 번 47년의 역사 속으로 산책해본다. 주말이면 학과의 학생들과 서울의 주변을 답사하다 날이 저물었다. 몹시 무덥던 1963년 여름, 최소한의 경비로 경주와 영주 및 해인사를 어렵게 여행하던 시절이 오히려 몹시 그리워진다. 경주의 서천에서 목욕하고, 김유신장군 묘를 거쳐 불국사의 마당에서 밤을 지내면서 남산의 석불을 찾아 오르내리던 아름다운 추억에 잠겨본다.
  해인사를 찾을 무렵, 경비가 거의 다 떨어졌는데 그곳의 운허스님께 인사하고 아주 깨끗한 방에서 밤을 지내고 세끼의 좋은 식사를 하게 된 것은 참으로 행운이었다. 그 때 올랐던 가야산의 주봉에서는 여름이어도 바람이 서늘할 정도였고, 도중의 마애석불을 찾느라고 땀을 흘리던 기억이 새롭다. 떠나던 날 주지스님의 호통을 맞으며 창고에 보관된 보물급 비석을 탁본하던 일이나, 해인사의 동구의 농산정(籠山亭)에서 바위에 새겨진 신라시대 최치원(崔致遠)의 시를 조선의 송시열이 쓴 글의 탁본은 아직 보관하고 있다.
  그때 경희의 원년, ‘문화세계의 창조’란 교시탑을 향해 등용문을 들어선 우리 신입생들의 얼굴에는 이제 주름살이 훈장처럼 늘어나고, 걸음걸이가 지나치게 신중하게 느려졌지만 마음만은 아직도 그때와 다를 바 없다.

10월에 만나는 우리들의 모임을 기대하며....
  그날들을 되돌아보며 밀린 이야기들을 하고 싶어 지난 9월 4일 동문회관에서 다시 만났다. 그간 변화된 모습에 서로 놀라기도 하면서 또 반가워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고아처럼 외롭게 자랐기 때문에 지금 어려운 아이들을 돕는 국제적인 봉사단체를 운영하는 동문도 있고, 체육대학을 졸업하고 특히 영어를 잘해 미국에 가서 정치적으로 상당한 성공을 거둔 뒤 지금 한국에 돌아와 세계태권도 연맹의 사무총장으로 활약하는 동문도 있다. 그 어려운 시기에 KBS에 입사하여 오늘날까지 성공적으로 활동하며 남달리 동문들에 대한 사랑을 말하는 동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모두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누구나 나만이 힘들었고 또 사회적으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같이 고생하며 출발한 동문들의 여러 모습과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같지 않은 나름대로의 힘든 그러나 매우 힘찬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왔음을 듣는 것은 참으로 고맙고 눈물겨운 일이다.
  그래서 오는 10월 23일, 1960년 4월에 입학하여 1963년 12월 30일에 졸업한 12회 동문들의 모임을 갖기로 했다. 보다 많은 동문들의 모습과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는 감동적인 자리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경희 캠퍼스의 초록색 짙은 봄이나, 울창한 여름의 숲이 좋지만, 가을의 단풍이나 잎이 떨어진 나뭇가지에 눈송이가 쌓인 숲도 역시 아름답다. 우리의 이마에 패인 주름살을 보면서 닦아 온 노년을 느끼지만, 또 거기서 우리는 삶의 경륜과 함께 커다란 성취의 영광을 보면서 참으로 흐뭇하다.
  이것이 10월에 만나는 우리들의 모임을 더욱 간절하게 기다리는 커다란 이유이다.
 
  사진 2: 본관 앞 분수대에서( 앞줄 오른편이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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