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동문회 최재흥 동문

경희대학교 총동문회
Kyung Hee University Alumni Association
z특집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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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동문회 최재흥 동문

관리자 0 7194
사진: 허드슨강의 조지워싱턴다리 앞에서

뉴욕은 서울만큼 바빴다.
베이글과 커피를 들고 거리를 누비는 전형적인 뉴요커부터 지하철 입구에서 한 보따리 짐을 들고 걸어 나오는 노숙자까지. 모두 아침을 맞느라 분주했다.
이들은 수십 개의 각기 다른 언어로 떠들다가도 열 걸음에 한번씩은 '쏘리'와 '익스큐즈미'를 외쳤다.
덕분에 기자는 열 걸음 당 한번씩은 '미안'하고 '실례'한다는 그 말을 들어야 했다.
 브로드웨이 32번가.
마치 서울 시내의 한 모퉁이를 들어선 듯 낯익은 코리아 타운에 도착했다.
맨해튼의 중심가라 사람 많은 것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익숙한 한국어가 들리고, '설렁탕', '삼겹살' 등 흐뭇한 간판이 붙은 한국 음식점이 줄지어 있었다.
그 중 경희대 동문이 운영한다는 강서회관 2층에서 뉴욕총동문회의 대부라 불리는 최재흥 동문(정치외교 13기)을 만났다.
그는 비스듬히 쓴 안경 너머로 신문을 읽고 있었다. 
"내가 75년도에 미국에 왔으니까.. 허허, 벌써 32년이 됐네." 뉴욕동문회 8대, 16대 회장을 역임하며 수많은 경희 동문의 아버지 역할을 해온 최 동문. '대부'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그의 지난 세월은 늘 경희와 함께였다.
"능력이 부족해서 회장을 두 번까지 했지 뭘."
모교에 대한 애정이 누구보다 크고 깊어서 란걸 누가 모를까.
그는 괜한 말로 자신을 낮춘다. 

< 병원진료비 등 모교의 국제적 지원 20년간 지속 >

"우리학교는 국제적인 지원이 정말 남달라. 형편이 어려운 뉴욕 한인동포들의 병원진료비를 20년간 지원해 주고 있으니." 해외 동포들의 어려운 사정은 최 동문에 의해 처음 우리학교에 전해졌다.
"생활이 여의치 않은 한인들은 보험을 들지 않잖아. 그러니까 아파도 비싼 진료비 때문에 병원에 가질 않지."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된 경희의료원은 뉴욕동포증명서를 지참한 한인들의 진료비를 일부 할인해 주며 국제화, 세계화의 학교이념을 실천해 오고 있다. 
"덕분에 경희의료원에 가서 병 고치고 돌아온 사람이 많아.
경희 동문이 아닌데도 이렇게 도와주니 모두 마음깊이 고마워하고 있지."
모교의 선행만큼이나 뉴욕 동문들도 한인사회에서 남다른 활약을 보이고 있다.
"우리 동문들이 참 적극적이고 아이디어가 넘치는 사람들인 것 같아.
한국에 있는 대학교 동문들의 모임인 '뉴욕대한동문연합회'와 '골프토너먼트'를 우리학교가 주도해서 만들었거든. 동포 장학금도 마련하고."
그는 뉴욕대한동문연합회 초대회장이 우리학교 김정길 동문(법대 11기)이었다고 덧붙인다. 
"초창기 때는 지금보다 동문들 간의 끈끈한 정이 있었지.
정착하는데 생기는 어려움을 서로 위로해주고 사업정보도 나누면서...
그런데 지금은 자신들의 세계가 생기면서 동문회가 전보다 위축되어서 안타까워." 그는 앞으로 동문회의 활성화를 위해 등록이 안 돼있는 회원을 발굴하고, 신문지면을 통해 동문회 소식을 꾸준히 홍보할 계획이다.
“80대 중반의 선배님도 학교가 그리워서 동문회에 가끔 참석하시는데 오히려 후배들은 관심이 없는 것 같아.
나는 참 재밌는데 말이야.”
최 동문은 처음 미국에 왔을 때를 떠올렸다.

<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와 설렘은 고달픔을 이기는 비결 >

“지금은 슈퍼마켓을 경영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태권도를 가르쳤지.”
지금의 그는 3000명의 회원을 이끄는 ‘청과일 협회’의 회장이자 뉴저지에서 ‘Good Nature Inc’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사장님이지만, 30년 전만 해도 그는 태권도 4단의 호랑이 선생님이었다.
“국가에서 파견한 태권도 선생이었어, 내가. 한국문화를 알리러 와서 버릇없는 미국학생들에게 한국식 예의를 가르쳤지.”
듬직한 체격의 최 동문은 발차기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호탕하게 웃어보였다. 
초등학생 손자손녀를 둔 할아버지라기보다 아직도 ‘태권!’을 외치는 것이 더 어울릴 법한 최 동문.
그는 지난 88올림픽에서 미국 올림픽 후원회 회장을 역임하며 성화 릴레이에 참여했다.
“그 때의 짜릿한 기분이 지금도 생생해.”
남들보다 젊게 사는 비결, 그에겐 운동과 긍정적인 마인드였다.
“지금도 운동을 좋아하지.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미국에 처음 왔을 때도 몸이 힘든 것 보다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와 설렘으로 고달픔을 이겨냈다는 그다. 넘치는 에너지로 뉴욕동문회, 나아가 뉴욕한인사회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는 최 동문의 존재는 어찌 보면 뉴욕동문회의 역사가 아닐는지. 뉴저지와 맨해튼을 연결하는 조지 워싱턴 브리지를 건너면서 그는 얘기했다.
“이제 나는 저무는 태양이지....... the sun declines.” 그의 넉넉한 미소가 허드슨 강에 내려앉은 물안개처럼 아련하게 피어올랐다.

인터넷 Future 경희 - 강민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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