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식 학원장, “생각하는 자, 천하를 얻는다”

경희대학교 총동문회
Kyung Hee University Alumni Association
z특집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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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식 학원장, “생각하는 자, 천하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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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교 서울캠퍼스 정문에 들어서면 약 150미터 전방에 잘 가꾸어진 숲과 어우러진 탑이 하나 세워져 있다. 경희대학교 창학이념을 새겨 넣은 교시탑(校是塔)이다.

 1955년 7월 24일 건립된 이 탑에는 흰색 바탕에 검은 글씨로‘문화세계의 창조’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20미터 높이의 교시탑은 조영식 학원장의 삶과 경희의 역사를 상징하듯이 우뚝 솟아 있다.

 조영식 학원장은 사상가로서, 실천가로서, 평화운동가로서 다양한 삶의 궤적을 밟아왔다. 그 바탕에는 일관된 신념이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경희대학교의 교시 ‘문화세계의 창조’에 요약돼 있다.

 1921년 11월 22일 금산지로 유명한 평안북도 운산에서 태어난 조영식 학원장은 광산을 경영하는 부친 밑에서 자랐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는 가르침을 받은 소년 조영식은 늘 책을 읽고 사색하는 습관이 배어 있었다.

 해방 전, 목사의 길을 꿈꾸며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체육대학에 입학했고 1943년 10월, 평생의 반려인 오정명 여사와 결혼했다. 1944년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돼 훈련소로 끌려갔다. 이곳에서 조영식학원장은 탈출을 결심하고 조선인 학도병들을 규합했지만 거사 직전 정보가 유출돼 약 1개월간 취조를 받고 석 달간 수감생활을 했다. 언제 전쟁터로 끌려갈지 모르는 암담한 상황에서 그는 함께 수감된 동지들에게 ‘미래를 위해 일할 준비를 하자’고 제안해 토론식 학습을 진행했다.

“그는 교육자이자 사상가였고
학자이자 예술가였으며
무엇보다도
세계인이자 실천가였습니다”

 훗날 조영식 학원장은“우주와 삼라만상의 변화 속에서 인생을 명상하고 사색하는 가운데,  통합과 조화라는 삼차원적우주관, 유기적 통일체관의 근원을 발견하게 됐다”고 그 시절을 회고했다. ‘미원’이라는 아호 역시 서로 다른 생각들이 충돌하며 근원을 향해 조화롭게 발전하는 토론학습 경험에서 비롯됐다.

 서울대 법대 재학 시절에는 하루 평균10시간이 넘도록 책을 읽었다. 이런 노력 덕에 조영식 학원장은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첫 저서 <민주주의 자유론>을 펴냈다.

 이후 신흥초급대학을 인수해달라는 뜻밖의 제안이 들어왔다. 피란정부의부통령 이던 이시영선생의 부탁이었다. 학교를 인수한지 2주일 만에 부산역 바로 맞은편 언덕 위에 학교 부지를 마련했다. 조영식 학원장은1인3역을 도맡아 재단이사장과 학장직을 겸임하면서 재정을 마련하느라 동분서주했다. 또한교직원들과토론하며행정합리화방안을모색하고직접강단에 올라 ‘민주주의론’을 강의했다.

 그러나 1953년에 예상치 못한 화재가 발생해 공들여 지은 교사가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조 학원장은 좌절하지 않고 밤낮없이 학교재건에 나서 새 교사를 건립했고 후에 고황산기슭에 30만평의 교지를 확보해 지금의 서울캠퍼스를 구상했다. 신흥초급대학을 인수한지10년째 되는 해인 1960년에는 학교이름을 경희대학교로 개명하고 이듬해 경희학원을 설립했다.

 그는 “불에 구우면 구울수록, 때리면 때릴수록 쇠는 더 굳어지고 강해진다”는 말을 되뇌곤 했다. 이때의 경험이 오늘날 경희대학교를 세계적 명문으로 도약하게 하는 밑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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