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러운 경희인 1-헌법재판연구원 초대 원장에 취임한 허영(법학55) 동문

경희대학교 총동문회
Kyung Hee University Alumni Association
z특집기사
b2be20aff1002731ba18324625b305c0_1683866965_5319.jpg

자랑스러운 경희인 1-헌법재판연구원 초대 원장에 취임한 허영(법학55) 동문

관리자 0 4451
-헌법재판연구원에 대한 소개와 초대 연구원장으로 지난 1월 취임하셨습니다. 중책을 맡으신 소감 부탁드립니다.

헌법재판소 헌법재판연구원은 헌법재판소를 가진 세계 83개 나라 중에서 처음으로 우리나라가 만든 기관입니다. 매우 뜻 깊은 일이지요. 다른 나라에서 우리 연구원 활동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어요.
우리 연구원은 설치 근거 법령이 말하듯이 연구와 교수가 그 주목적입니다. 헌법재판소가 헌법재판을 하는데 이론적인 도움이 되는 헌법과 헌법재판제도 전반을 쟁점별로 깊이 있게 연구하고 있지요.
새로 오는 헌재 자체 헌법재판연구관이나 법원 검찰 등 다른 국가기관에서 파견하는 헌법재판연구관, 헌재 전속 국선변호인단, 재판소 내 행정지원부서 공무원, 군법무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공무원, 법조출입 언론인, Law School 학생 등을 상대로 헌법과 헌법재판에 대한 교육 내지 연수를 하는 일도 우리 연구소가 맡은 일입니다.
70을 넘긴 제가 이런 중요한 일을 하는 신설 기관의 초대원장으로 취임해서 어깨가 무겁습니다. 연구원의 기틀을 닦는 어려운 과제를 잘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막중한 책임감도 느낍니다. 헌재 안팎에서 우리 연구원에 거는 기대가 너무 크다 보니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사심 없이 열심히 소임을 다하도록 노력할 작정입니다.   

-2007년이었지요? 독일 본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으셨는데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본대학에서 명박 학위를 받은 인사는 동문님을 포함해 4명뿐이라고 들었습니다. 이는 동문님과 가족분들의 영광이고 기쁨일 뿐만 아니라 많은 경희동문들의 자랑입니다.

사실상 전혀 예측할 수도 없었고 기대할 수도 없는 영광이었어요. 저는 독일 뮌헨(München)대학과 바이로이트(Bayreuth)대학에서 각각 박사학위와 교수자격을 얻었습니다. 본(Bonn)대학과는 특별한 학문적인 인연은 없어요, 그래서 더욱 감격스러웠지요. 질문에서처럼 우리나라 대학과 달리 독일 대학은 명예박사학위를 매우 제한적으로만 줍니다. 오랜 전통입니다. 그래서 독일 대학의 명예박사학위를 받으면 정말 무엇보다 큰 영광으로 생각하는 게 그 나라 인식입니다. 제가 그런 영광의 주인공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헌법재판소 창립 초기부터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헌법과 헌법재판의 법리와 제도개선 등에 많은 이바지를 하셨습니다. 정년퇴임 후에도 헌법재판연구소를 개설, 온종일 연구소를 지키며 왕성하게 연구 활동을 해오시는 등 꾸준한 활동을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제 밑에서 공부하고 지금도 전국 각 대학과 법조계를 비롯한 여러 기관에서 활동하고 있는 많은 제자들의 격려와 성원이 큰 힘이 됩니다. 그 제자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야겠다는 책임감 같은 것도 늘 느끼고 있어요.
또 반드시 밝히고 싶은 게 있어요. 지금은 우리 모교도 이제 10위권 안에 드는 명문대학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세대만 해도 그렇지 못했어요. 그래서 다른 분야는 몰라도 우리 학계는 이른바 서울대를 중심으로 한 명문대 출신 학자들이 수적으로, 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어요. 그런 학계풍토의 생존경쟁에서 이기고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그들보다 더 열심히 노력해서 간판이 아닌 실력으로 보여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학계는 실력 앞에는 어쩔 수 없는 분야거든요.

-마음을 다잡을 때 되새기는 좌우명이 있으신가요?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 “시작이 반이다”, “유종의 미, 독일어로는 Ende gut alles gut” 등 입니다.

-‘통합주의 헌법학의 태두’라는 세간의 평가를 받고 계십니다. 이러한 이야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사실 통합주의 헌법철학은 제가 창설한 헌법철학은 아니고 독일 루돌프 스멘트(Rudolf Smend) 교수의 헌법이론입니다. 제가 독일에 유학할 때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잘 소개되지 않은 헌법철학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특별히 더 많은 흥미와 호감을 느낀 이론이었어요. 모든 헌법이론이 다 그렇듯이 이 이론도 완전무결한 것은 아니지요. 이론상의 허점도 물론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저 나름으로 제가 느끼는 이론상의 허점을 보완해서 1980년대 초 내 저서를 통해 우리나라에 처음 체계적으로 소개하고 전파한 것 뿐이예요. 다행이도 그 당시의 우리 정치상황과 맞물려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지요.

-40년 가까이 외길을 걸어 한 분야의 최고의 권위자가 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학창시절에도 뛰어난 인재로 주목받으셨을 것 같은데, 모교 재학시절 특히 기억에 남는 추억이 있으신가요?

저의 재학시절에 경희동산은 거의 황무지동산이나 다름 아니었어요. 6.25 직후라 판자집에서 강의를 들어야 했지요. 시설과 내용 모두 아주 열악한 환경이었어요. 지금의 재학생이나 후배들이 매우 부럽습니다.
저는 고교때까지는 아주 뛰어나다는 평을 들었어요. 그렇지만 고3때 폐결핵으로 고생하다 경희에 특대생으로 입학하게 되었어요. 남달리 모교의 많은 특혜도 받았어요. 그렇지만 병치료 때문에 학교생활에 충실하지 못한 것이 한으로 남아요. 3학년 때 겨우 치료가 되어 졸업할 때 까지 한 2년 대학생활을 했다고 할 수 있지요. 돌아가신 안이준 선생님이나 엄민영 학장님이 베풀어 주신 각별하신 사랑과 격려가 지금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네요. 

-형제분들을 비롯해 모교 생물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신 부인 이호자(생물62) 동문님도 모교 출신이라고 들었습니다. 경희와의 남다른 인연을 소개해주세요.

조영식 학원장님의 원대하신 포부와 추진력 그리고 저에 대한 특별하신 사랑이 저를 경희와 인연을 맺게 했어요.
그러고 보니 제 집사람도 경희에서 고르게 되었고요. 지금 생각하면 제 집사람은 제 모교가 제게 준 가장 큰 선물이라 생각합니다. 집사람 외에도 친동생 3명이 경희동문으로, 총 5명이 경희가족입니다.

-많은 젊은 후배들이 동문님을 롤모델로 삼고 훌륭한 헌법학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후배들에게 들려주실 말씀은 어떤 게 있을까요?

노력 없이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어요. 머리만 갖고 되지 않습니다. 강한 집념을 가지고 학문을 해야 해요. 남을 모방하지 말고 자신의 독창적인 학문세계를 개척하라고 권하고 싶네요. 또 눈을 크게 뜨고 국내가 아닌 국제무대를 경쟁장소로 삼아야 합니다. 통치규범인 헌법은 어떤 의미에서는 토속적인 학문이 아니라 글로벌한 학문이니까요. 북한의 인권문제에 세계가 함께 관심을 갖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지요.

<허영 동문의 모교사랑 아이콘>
●캠퍼스 속 추억의 장소
열악한 시설 속에서 공부한 판자강의실이 기억에 납니다. 지금의 문과대학 자리이군요.

●자주 가던 식당 / 찻집
특별히 없습니다.

●학창 시절 가장 기억나는 교수님
고 안이준 교수님과 엄민영 학장님입니다.

●경희는 □이다.
제게 경희는 ‘꿈’이었습니다.

허영 동문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원로 헌법학자로서 헌법학계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충남 부여 출생으로 59년 모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71년 독일 뮌헨대에서 법학박사를 받았다. 이후 독일 자르브뤼켄대 조교수, 독일 본대·바이로이트대 교수를 지내고 82년부터 2001년까지 연세대 법학과 교수로 활동했다.
한국공법학회 회장, 뮌헨대 초빙교수, 명지대 법학과 초빙교수를 역임했으며 지난 2007년 독일 본대 명예법학박사를 받았다.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