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사람> 김애미(무용98) 금파춤보존회 이사장
- 조석창
- 승인 2021.10.06 15:16
부모밑에서 무용 보고 들어
'무용'으로 인생의 꿈 키워
무용단 소속 틀안의 활동에
애미아트 단체 만들어 활동
중국춤 매력에 유학길 택해
박사학위 취득 용기 되찾아
금파 명맥-전북춤 확장몰두

“무용은 내 삶의 전부이며, 무용이 없다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하기까지 했다. 무용을 통해 인생을 걸고, 전북무용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겠다.”
금파춤보존회 김애미 이사장은 뱃속에서부터 춤을 배운 이른바 ‘모태 춤꿈’이다.
아버지 금파 김조균과 어머니 김숙 전 전북무용협회장 사이에서 태어나 보고 들은 게 무용이 전부였다.
놀이터도 무용학원이었고, 자연스럽게 무용이 일상이 됐다 중고등학교를 무용특기생으로 다녔고 대학에서도 무용을 통해 인생의 꿈을 키워갔다.
무용 이외에는 아는 게 없다는 말이 헛말이 아닐 정도였다.
“아버지에게 무용 재능을 물려받았고, 어머니에게 대담성과 적극성을 내려받았다. 무용인이 가져야 할 재능과 대담함, 적극적인 면을 고루 익힐 수 있는 점은 타고난 복이었다.”
경희대를 졸업하고 경기도립무용단에 입단했다.
갑자기 아버지가 세상을 뜨는 바람에 스스로 생계를 챙겨야 했다.
하지만 무용단 같은 단체에 소속돼 활동하는 것은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특히 춤에 호기심이 많은 나이에 정해진 틀 안에서 활동하는 것은 늘 불만이었다.
주어진 작품에만 춤을 춰야 됐고, 자칫 나태해질 우려가 있어 과감히 무용단을 그만두고 전주로 내려왔다.
2006년 애미아트란 단체를 만들어 본격 활동에 들어갔고, 중국 유학의 꿈을 키워나갔다.
유학 대상을 중국으로 택한 것은 경기도립무용단 근무 당시 우연히 접했던 중국춤에 대해 묘한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객원으로 출연한 중국 무용수의 춤을 접한 뒤 한 번도 보지 못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당시 한국에서도 창작무용이 유행처럼 번졌지만 많은 작품이 중국의 소수민족 춤에서 비롯됐다는 것도 알게 됐다.
물론 먼 훗날에 말이다.
이들의 춤을 직접 보고 느끼고 싶었다.
중국에서 배운 후 우리 실정에 맞게 접목시키고 싶었다.
알고 배우는 것과 모르고 따라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학길은 잠시 미뤄졌다.
뜻하지 않게 2009년 전국무용제에 전북대표로 애미아트가 참가하게 된 것이다.
작품을 짜고 춤추는 재미에 빠져 유학의 꿈은 점점 멀어져갔다.
3년 동안 미친 듯이 활동했고, 현재 남아있든 작품 대부분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또 다시 나태해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신을 차려보니 잠시 잊어버렸던 유학이 다시 떠올랐다.
더 늦기 전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진행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가장 잘 나가던 시절, 잠시 멈추고 유학길에 오른 것은 큰 용기였다.
35살이란 늦은 나이에 찾은 중국생활은 순탄하지는 않았다.
15살에 대학에 입학하고 20살에 독립하는 중국 학생들과 함께해야 했다.
당초 춤을 배우러 갔지만 내친김에 학위에 도전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1년 동안 언어공부에 매진하고 수업을 청강하며 더듬더듬 중국말을 이어갔다.
중국 교수도 만류에 나섰다.
중도에 포기할 것이란 판단에서다.
외로운 유학생활은 시간이 갈수록 힘들고 평생 잊을 수 없는 시간이 됐다.
눈물 젖은 빵을 수도 없이 먹으며 버텼고, 학비 마련을 위해 방학이면 귀국해 아르바이트를 했다.
2015년도에 급작스레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빈자리는 오히려 공부에 자극제가 됐다.
어머니 병간호를 위해 잠시 귀국했고 다시는 중국에 가지 못할 것이란 실의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항상 믿고 지켜봐준 어머니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시 잡고 중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학위를 따지 못하면 귀국하지 않겠다는 단단한 각오를 앞세웠다.
향수병에 걸릴 상황이 아닐 정도로 다급했고 절실했다.
몸도 많이 상했지만 논문에만 집중했고, 결국 2019년 12월 중앙민족대학교 박사학위 취득에 성공했다.
‘한국궁중무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의 합설연구’란 제목의 논문은 한국의 전통무용을 중국 무용계에 소개함은 물론 중국 무용학계에 기호학이란 새로운 이론적 지평을 펼쳐보였다는 평을 받았다.
왼손에는 졸업장, 오른손에 논문을 들고 당당히 귀국을 했다.
어머니 산소에 들러 논문을 보여주며 자랑스러운 딸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 했던가.
귀국 후 터진 코로나 사태는 발길 바쁜 젊은 무용수의 발목을 잡았다.
의도치 않은 휴식기를 거치면서 답답하기만 했다.
평소 다져온 인적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국제교류를 하고 싶었고, 새로운 춤을 만들어 춤의 확장성을 제시하고 싶었다.
준비는 다 마쳤고 스스로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
‘위드 코로나’ 시대를 맞아 현 상황을 헤쳐 나갈 방안마련에 몰두하고 있다.
춤만 추면 행복했다.
3살 무렵 공연 팸플릿에 사진이 실릴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함께했다.
춤은 곧 자신이며, 춤이 없는 세상은 꿈도 꾸지 못했다.
세상 물정 모르고 살아가는 피터팬처럼 자신이 춤 인생이 깨지고 변질될까봐 우려되기도 했다.
하지만 춤이 있기에 자신감은 항상 풍만하다.
아버지 금파의 명맥도 잇고 전북의 춤을 확장하는 게 자신의 몫이다.
전통과 그 안의 자신의 모습을 지키고, 우리 것을 세계로 뻗어나가는 기회를 만들고 싶었다.
“춤을 추는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도록 되새기고 있다. 내 자신을 알리고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한 구상에 한창이다. 코로나로 인해 잠시 주춤한 상황이지만 기회만 되면 언제든지 빛을 발할 수 있는 준비가 돼 있다. 많은 관심을 바란다.”
/조석창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