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혜경-번역가와 연주가의 숙명이란…


동문특별강좌 서혜경-번역가와 연주가의 숙명이란…

작성일 2010-11-19
▲서혜경(모교 음악대학 교수)

번역가는 원작에 대한 의무와 독자에 대한 책임을 이중으로 져야 한다. 그것은 번역가의 숙명이다. 번역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연주도 마찬가지다. 연주란 작곡자의 작품을 청중에게 번역해주는 행위다. 해마다 수만 개 극장에서 수십만 건의 연주회가 열리지만 진정으로 청중을 몰입시키고 감동케 하는 연주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다.

작품은 작곡자의 것이지만 연주하는 순간만은 연주자의 것이다. 나는 좋은 음악을 만들어 내는 데는 작곡자의 몫이 반이고, 나머지 반은 연주자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빼어난 작품도 설익은 연주자 손에서는 엉성한 음악으로 표현되게 마련이고 좋은 연주자의 손끝에서만 훌륭한 작품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피아노 협주곡 중에서 가장 자주 연주되는 것으로는 라흐마니노프 2번과 차이콥스키 1번, 베토벤 5번이라는 통계를 본 일이 있다. 나도 이 세 곡을 수백 번 넘게 세계 유수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특히 라흐마니노프 2번은 열아홉 살 때부터 수도 없이 연주했다. 자연히 음반을 만들자는 권유도 많았고 스스로 녹음을 하고 싶은 충동도 많았다.

그러나 레코드라는 것은 글자 그대로 기록이라는 말이 아닌가. 음반이란 두고두고 남는 기록이요, 흔적이라는 부담감 때문에 좀 더 원숙한 기량과 음악적 완성의 자신감이 생길 때까지 미루어 왔다. 작곡가와 청중 모두에게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연주를 남기고 싶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고약한 질병으로 죽음의 문턱에 도달했을 때 더 이상 미룰 수는 없음을 깨달았다. 서혜경이라는 연주가의 존재를 음악사에 남기는 것은 음반의 출반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것이다.

2년간의 기획과 준비 끝에 지난 7월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다섯 곡 전집을 녹음하게 되었다. 러시아 작곡가인 라흐마니노프의 해석이 가장 뛰어난 지휘자와 교향악단을 찾아서 러시아의 고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간 것이다.

마에스트로 알렉산더 드미트리예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난 33년간 조련해온 전대미문의 지휘자다. 음향 프로듀서로는 정통 방식을 고집하기로 유명한 영국인 토니 포크너와 호흡을 맞추었다. 이 사람은 녹음 과정에서 일체의 기계적인 효과와 인위적인 조작을 배제하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심지어는 마스터링 때 전체 음량을 5데시벨(㏈)만 높이자는 나의 요청마저 거절한 사람이다. 조금만 음량을 높이면 훨씬 화려하고 웅장하게 들릴 것이라는 설득도 단호하게 거절했다. 진행감독이 두세 번 집요하게 요구하자 "나는 청중을 속이는 그런 더러운 장난은 치지 않는다. 가장 현장감 있는 녹음이 훌륭한 녹음이다. 음반을 두고두고 들어보라. 결국은 내 방식이 옳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라며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녹음 나흘째 되는 날엔 전체 계획을 망가뜨릴 심각한 사고가 생겼다. 아침에 일어나자 극심한 통증으로 팔을 움직일 수가 없는 것이다. 오랫동안의 준비와 노력이 허사로 돌아갈 수 있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120명이 넘는 전 스태프의 출근을 정지시키고 병원으로 갔다. 어깨에 3대의 주사를 맞고 하루 종일 치료사를 불러 근육을 풀기 위해 애를 썼다.

우여곡절 끝에 어깨와 팔에 보호대를 차고 녹음을 완료했다. 등반가들이 히말라야산을 오르는 것만큼이나 힘들고 먼 장정이었다. 다행히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결과물을 얻었고 처음부터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여류 피아니스트 세계 최초의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전집이라는 기록도 갖게 되었다.

사라지고 변화하는 것만이 우주의 진리이고, 긴 시간 속에서는 그 흔적마저 사라져 가겠지만 그래도 나는 연주가로서 뚜렷한 발자국을 하나하나 남기고 싶다.

[2010. 11. 12 매일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