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특별강좌
신봉승-여성비하? 조선은 여성에 품직으로 예우했다
▲신봉승(국문57, 극작가, 총동문회 이사)
조선시대를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시대라고 치부하는 사람들이 뜻밖으로 많다. 조선시대는 여성을 비하하고 천대한 것이 아니라, 여성들에게 품직(品職)을 주어 예우하였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르는 듯하다.
남편이 영의정이나 판서와 같은 1품직에 오르면 그분들의 아내에는 정경부인(貞敬夫人)이라는 외명부 1품직을 내렸고, 남편이 2품직인 참판직에 오르면 그 부인들에게는 정부인(貞夫人)이라는 외명부 2품직을 내려서 예우하였다.
남편이 3품직이면 그 아내에게는 숙부인(淑夫人)이 된다. 물론 호칭도 ‘정경부인 마님’, ‘정부인 마님’, 혹은 ‘숙부인 마님’으로 예우하여 불렀다. 그리하여 남편이 9품직이면 그 부인에게는 역시 외명부 9품직인 유인(孺人)이 내려진다.
이글을 읽는 독자들이 할머니의 제사를 지낼 때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 그 위패에 <유인>라고 쓰는 것은 외명부 9품직을 받았음을 과시하는 일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독자 여러분의 할머니나 어머님들에게 <유인>이라는 벼슬을 내릴 수도 없고, 내린 일도 없다.
그런데 21세기를 사는 오늘날에도 고학력의 지식인들이 할머니나 어머니의 위패에 <유인>이라고 쓴다면 사문서 위조가 되지를 않겠는가. 그러면서도 조선시대가 남존여비의 시대라고 목청을 높인다면 자가당착이 아니고 무엇이랴.
조선시대를 살면서 남편을 위해 학문적인 봉사를 한 여성은 수 없이 많고, 때로는 정치적인 동반자가 되어 남편을 임금의 자리에 끌어 올린 여성도 있다.
태종비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가 그 대표적인 여성이다. 원경왕후 민씨는 고려 말 개경(개성)의 명문이었던 여흥 민씨 가문 중에서도 대석학이자 후일 한성판윤으로 이름을 떨친 민제의 둘째 따님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민제가 이방원의 스승이었던 것이 계기가 되어 두 살 아래인 이방원과 결혼하게 되었다면 물론 이성계가 고려 말의 명장이었던 사실도 감안되었을 터이다.
마침내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돌아온다. 왕명을 거역하면서까지 회군하여 돌아오자면 고려 조정을 뒤엎을 각오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명장 최영은 소실의 딸이 우왕의 후궁이었던 탓으로 문하시중(지금의 총리)의 자리에 있었고, 위화도에서 돌아오는 이성계를 잡아들여서 중벌을 내려야 할 처지다.
그러나 개성의 민심이 문제였다. 이미 파다하게 퍼진 목자득국(木子得國·이씨가 나라를 세운다)이라는 풍문이 태풍처럼 몰아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성계의 다섯 때 아들인 이방원의 비상한 머리에서 나온 지혜라면 또한 그의 아내 민씨의 협력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개경으로 돌아온 이성계는 최영의 일당을 몰아내고 새로운 나라 조선왕조를 창업하였다.
이성계가 조선왕조의 첫 임금이 되면서 민씨는 정녕옹주(靖寧翁主)에 책봉된다. 그러나 이성계의 후처인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인 방석(芳碩·당시 12세)이 세자로 책봉되면서 이방원은 분노가 폭발한다.
물론 그의 아내 정녕옹주와 그녀의 아우들이 잠자코 있을 까닭이 없다. 이것이 제1차 ´왕자의 난´으로 번져가는 화근이 된다.
태조 이성계의 측근이면서 또한 신덕왕후의 지근에 있었던 삼봉 정도전은 차후의 난동을 피하려는 방책으로 사병(私兵)의 해산을 꾀한다.
종친인 이방원으로서는 사병의 해산에 반발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의 아내 정녕옹주 민씨는 달랐다.
그녀의 사가(친정)에는 정말로 끌끌한 남동생들이 네 사람이나 있었다.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그들이다.
정녕옹주는 그들에게 사병들을 기르게 하였고, 은밀하게 무기를 마련하여 때가 오기를 기다리도록 하였다.
신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이방원은 처남들의 협력을 얻어 세자 방석과 그를 옹립한 정도전, 박은을 일거에 쓸어 넘긴다. 이른바 1차 왕자의 난이다.
정세가 어수선해지자 이방원의 친형인 방간(회안대군)이 왕위를 탐하면서 아우 이방원의 제거에 나섰지만 민씨 형제를 중심으로 한 이방원의 사병을 당할 길이 없다.
이같은 2차 왕자의 난을 수습하면서 이방원은 조선왕조의 세 번째 임금(태종)으로 등극하게 되었고, 당연히 민씨는 왕비(원경왕후)가 된다.
임금이 된 태종 이방원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기 위한 큰 그림을 그린다. 맏아들 양녕대군을 물리치고 셋째아들 충녕대군(후일의 세종)을 세자로 세우면서 그의 방해세력을 제거하기 시작한다.
그 첫 번째 케이스가 외척의 발호를 잠재우는 일이다. 우선 친 처남인 민무구, 민무질을 귀양 보낸다. 원경왕후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수밖에 없다.
“누가 너를 임금으로 만들었는데…!”
그렇다. 원경왕후는 반발은 광태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이방원의 분노는 한 술 더 뜬다.
“중전을 폐하라!”
신하들은 중전을 폐해서는 안 된다고 눈물로 호소하지만 부부의 금실은 하루아침에 악귀사이로 변한다.
태종 이방은 제주도에 부처된 민무구, 민무질 형제에게 사약을 내리고, 남아 있는 처남들인 민무휼, 민무회까지 사사한다. ‘외척이 성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신념의 일환이라면, 선견지명이 아닐 수 없다.
원경왕후의 분노와 슬픔은 하늘을 찔렀다. 두 사람은 같은 울안인 경복궁에 살면서도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
막내아들 성녕대군이 두 사람 사이를 내왕하면서 부부간의 소식을 대신 전하고 하였으나, 그 성녕대군마저도 일찍 세상을 떠나자 원경왕후는 마지막 의지처까지 잃게 된다.
여장부로서의 꿈을 이루어 왕비의 자리에까지 올랐어도 원경왕후의 말년은 말 그대로 형극의 가시밭길이었다.
자신의 염원대로 사랑하는 지아비를 임금의 자리에까지 올려놓았으면서도 바로 그 일이 자신의 말로는 참담하게 할 줄을 어찌 짐작이나 했으랴.
같은 대궐(경복궁)에서 살면서도 지아비 태종과 말 한마디 나눌 수가 없었던 그녀의 말년을 어찌 참담하다고 아니하랴.
원경왕후는 태종 이방원보다 2년 먼저 세상을 떠나니 향년 56세였다. 그러나 그녀의 마지막 2년은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셋째 아들 성군 세종대왕의 어머님이었으므로.....
[2010. 7. 21 데일리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