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특별강좌
이택광-부산 여중생은 왜 목숨을 잃었나
▲이택광(모교 외국어대학 교수)
일명 김길태 사건이 연일 우리의 시선을 끌고 있다. 이제 자백까지 이끌어내었으니 상황은 더 극적으로 바뀌었다. 모든 언론과 국민의 시선이 김길태의 입에서 쏟아져 나올 '충격적인 범행'에 맞춰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비슷한 사건을 보도하는 언론의 행태에 대한 지적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사정은 전혀 나아지지 않고 있다. 사건을 사회적 맥락에서 떼어내어서 김길태라는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는 태도에서 이런 한계가 발생한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은 무엇일까?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성폭행 전과자에게 전자발찌를 채워야한다는 걸까, 아니면 흉악범들을 완전히 세상에서 제거해버릴 사형 제도를 강화해야한다는 걸까? 과연 이렇게 제도를 개선하고 효율적으로 운용한다면 이런 사건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수 있을까? 물론 제대로 시행만 한다면 반복적으로 비슷한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미봉책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지금은 관심이 김길태라는 '파렴치한 악인'에게 집중되고 있지만, 결국 이 사건의 피해자는 덕포동에 살고 있던 한 여중생이었다. 일부 언론은 여중생의 죽음에 호들갑을 떨 뿐, 정작 중요한 생전의 여중생에 주목하지 않는다. 이 여중생이 어떻게 살다가 변을 당했는지 아무도 관심이 없다. 마치 미국범죄드라마처럼, 이 사건의 주인공은 김길태라는 잔인한 '사이코패스'와 이를 멋지게 요리하는 CSI와 프로파일러이다. 상상의 세계에서 펼쳐지던 것들이 실현되었다는 점에서 언론의 관객들은 어떤 가상의 드라마보다도 이번 사건에서 강렬한 박진감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스펙터클을 넘어서서 우리는 질문해야한다. 그 여중생은 왜 집에 혼자 있었고, 그 동네는 왜 그토록 빈집들이 많았는지 말이다. 결국 재개발이라는 한국 사회의 도시정책이 이런 사건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는 원인이 아닌지 우리는 반문해야한다. 재개발이라는 명목으로 거주민들을 몰아내고 동네를 파괴하는 것이 누구에게 가장 극심한 피해를 주고 있는지 이번 사건은 정확하게 증명한다. 부동산 시세차익을 통한 부의 축적방식은 거주민들에게 결코 안전한 삶을 보장할 수가 없다. 어제까지 한 동네 주민이었던 이들은 하루아침에 뿔뿔이 흩어져서 각자 살 길을 찾아가야한다. 이것이 곧 198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 펼쳐졌던 신산한 삶의 풍경이었다.
이번 사건이 우리에게 일깨우는 것은 이렇게 마구잡이로 달려온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반성이다. 용산 철거민과 부산 여중생의 죽음은 사실 그렇게 멀리 있지 않은 것이다. 재개발의 이권에 삶의 터전을 내어주는 악순환을 끝내지 않는다면 이번 사건은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김길태 사건은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무너진 '우리 동네'의 잔해 속에 도사리고 있던 위험이 현실로 튀어나온 것에 불과하다. 유령처럼 텅 빈 집들은 '동네 발전'이라는 명분으로 방치되어 있던 공간이다. 사람들이 떠나버린 폐허에서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어린 생명이 목숨을 잃었다. 김길태라는 극악무도한 범인에게 모든 사태의 책임을 돌리면 간단하겠지만,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린들, 그를 완전히 세상에서 분리시킨들, 죽었던 여중생이 살아오지도, 앞으로 비슷하게 죽어갈 다른 여중생을 구하지도 못할 것이다. 이 사실이 안타깝다면 잠시 멈추어 근본적인 생각을 해보아야하지 않을까? 멈추지 않고 굴러가는 개발공화국에 우리 모두 나서 브레이크를 걸어야하지 않을까?
[2010. 3. 15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