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특별강좌
최혜실-男女 소통지사
▲최혜실(모교 국어국문학 교수)
시누이 남편의 호칭이 참 마땅치 않다. 서방님, 고모부 정도인데 그것도 논리적으로는 어색한 호칭이다. 그 이유는 남녀유별에 출가외인인 시누이의 남편을 만나는 기회가 극히 적었던 예전의 인간관계 때문이다. 이처럼 언어에는 그 사회의 문화와 제도가 깃들어 있다.
한국에서는 남녀가 사회인으로서 만나서 소통할 수 있는 언어구조가 참 없다. 남자들이 서로의 친분관계를 확인하는 구조는 은밀하면서도 다양하다. 명함을 교환하고 악수를 하며 자기소개를 하는 방식은 섬세하고 치밀하다. 누가 먼저 명함을 내미느냐에 따라 손위와 손아래가 규정되며 눈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상대방에 대한 존경과 감정이 나타난다. 이런 절차를 밟아 위계서열을 정립한 남자들은 정치, 스포츠 문제, 군대 이야기로 꽃을 피우다가 골프 라운딩 날짜를 잡기도 하고 사우나 일정을 잡기도 한다.
그러나 남자가 여자와의 사회적 친분관계를 드러내는 언어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남성들은 모임석상에서 주로 여자의 옷차림이나 미모에 찬사를 보내는데 그게 한참 하다 보면 분위기가 영 묘해지는 게 참 그런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담론구조는 주로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에서 이루어져 왔기 때문이다. 즉 남성이 여성과의 친분관계를 획책할 담론구조가 없기에 다른 것을 빌려다 쓰는 것이다. 이는 시누이 남편에게 남편을 지칭하는 서방님이나 조카와의 관계를 드러내는 고모부를 쓰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런 찬사도 주로 남자 쪽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법칙도 있다. 여성 둘이 있을 때 용모가 떨어지는 쪽에 먼저 말을 걸거나 칭찬을 해주라는 것. 그러나 만약 여자가 남자들에게 용모 칭찬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상할 것이다.
근대 남녀관계의 압권은 단연 낭만적 사랑이다. 근대의 결혼제도인 일부일처제를 유지하는 데 영혼과 육체의 일치로서의 사랑이 영원하다는 이데올로기는 아주 중요했던 것이고 이런 사랑의 방식은 소설, 영화, 드라마를 통해 반복되면서 확대재생산됐다. 결과적으로 남녀 간의 가장 중요한 관계가 돼버린 낭만적 사랑 때문에 다른 관계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게 돼버린 것이다. 낭만적 사랑의 ‘폐해’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사랑이란 이래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동성애가 비정상적인 것으로 치부됐고 가족이란 공동체는 남녀로 구성된 부부와 자녀로 제한됐다.
인간관계의 친밀함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모성애, 우정, 신의 아가페적 사랑, 박애, 자비로움, 동지애, 이성애, 동성애, 가족애 등 다양한 관계 중에서 단 하나의 관계가 이렇게 세상을 지배한다면 여자들의 사회생활은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젊은 시절, 주로 남성이 많았던 술좌석이나 노래방 등의 모임에서 종종 성적 수치심을 느껴야 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남녀 사이에서 이런 다양한 종류의 관계를 규정하는 담론구조가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던가 싶다.
당시 남녀공학 대학에서 여학생이 남자 선배를 ‘형’으로 불렀다. 여성이 남성과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 자신의 여성성을 철저히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단어였다. 이 상징은 곳곳에 나타나 여학생은 치마를 입거나 화장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불문율이 존재했고 공부 잘하는 여자는 인물이 별로라는 속설도 사실처럼 굳어졌다.
세상은 변했다. 이제 여성인력을 활용하지 못하면 고령사회를 해결할 수 없게 된 시점에서 남녀관계는 상열(相悅)이 소통의 한 종류에 불과할 정도로 축소돼야 한다. 그리고 그런 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담론구조의 정리가 선행돼야 한다. 이성 간의 관계가 동성 간의 관계와 같을 수는 없다. 남성성과 여성성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그 둘이 사회적으로 소통하는 관계임을 드러낼 수 있는 그런 언어가 많았으면 좋겠다.
최혜실 경희대 교수·문학평론가
[2009. 10. 16 세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