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곤-보수 기득권 세력의 광란?


동문특별강좌 이진곤-보수 기득권 세력의 광란?

작성일 2009-10-19
▲이진곤(정외69, 국민일보 논설고문, 총동문회 부회장)

"이명박 정권은 야만적인 행정도시 사냥을 즉각 중단하라." 대전·충남 시민사회단체 및 정당, 주민대표 등이 15일 충남도청 앞에서 가진 기자회견 때 나왔다는 구호다.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 수도권 보수 기득권세력들이 드디어 행정도시를 축소·무산·변경하기 위해 광란의 칼을 높이 빼들었다"는 말도 있었다고 전해졌다.

제대로 된 도시로 만들어야

오죽하면 그런 표현까지 했을까 해서 이해는 되지만 그렇다 해도 말이 너무 격하고 험하다. 갈수록 우리의 언어가 황폐화하는 것은 비할 바 없는 비극이다. 우리의 말과 글은 우리의 정체성과 정신의 표현이다. 우리 모두의 영혼에 얼룩이 지는 것 같아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2년 9월 30일 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 출범식에서 충청권 신행정수도 건설을 공약한 후 이 과제는 지금까지도 정치적 갈등과 충돌의 요인이 되고 있다. 헌재의 위헌결정으로 천도는 좌절됐지만 노 전 대통령과 당시 여당의 집념으로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을 강행하는 데는 성공했다. 2005년 3월에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특별법'이 제정 공포됐고, 이듬해 12월에는 '세종'이란 이름을 얻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추앙받아온 세종의 시호가 이 도시에 헌정된 것이다.

명분은 수도권 과밀화 해소와 지역균형발전이었다. 그러나 명과 실이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득표전략' 쪽이 더 우세했을 터이다. 대선에서 노 후보는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에게 57만980표를 이겼고 이 가운데 25만6천286표를 충청권의 지지에 힘입었다. 15대 대선에 이어 다시 한번 '충청도의 힘'이 과시된 것이다.

대의로 채워진 명분이었다고 하기도 어렵다. 인구 50만 명의 행정도시가 건설된다고 해서 수도권의 비만증이 해소될 리가 없다. 지역균형발전 논리도 이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특정 도시의 기능을 다른 특정 도시로 옮겨놓는 것과 지역균형발전은 맥락이 이어지지 않는다.

행정부처를 옮김으로써 지역균형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정말 확신했다면 그 효과가 각 지역에 골고루 미치도록 했어야 옳았다. 지금과 같이 교통·통신이 발달한 시대에 거리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부산에 있든 세종에 있든 그 때문에 업무처리가 더 어려워질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왜 부산은 안 되는가? 광주는 왜?

일단 법이 제정되었으니 두말 하지 말라면 이는 민주적 사고라고 할 수가 없다. 어떤 법이든 개정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법적 절차에 따라 '행복도시건설특별법'을 제정했다면 역시 합법적 절차를 통해 이를 개정할 수도 있는 일 아니겠는가.

해당지역의 개발 포기를 주장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미 사업이 시작된 만큼 이제는 유종의 미를 거두게 하는 길만이 있을 뿐이다. 계획 수정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게 바로 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행정기관이 들어서면 저절로 자족적 모범도시가 될 것처럼 선전하는 것은 옳지 않다. 냉철히 따질 것은 따져야 옳다. 그게 충청권 주민은 물론 국민을 위하는 길이다.

균형발전은 분권화로부터

교통수단이 비약적 발전을 거듭하는 시대다. 수도권 인근에 세워지는 행정도시는, 모르긴 몰라도 출퇴근 시간이 좀 더 길어지는 오피스 빌딩가 이상의 역할을 하긴 어렵다. 이전 부처들과 그 구성원들은 보나마나 두 집 살림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런 저런 점을 고려할 때 계획수정론자들에 대해 '광란' 운운하며 모질게 비난할 일만은 아니겠다. 사실상의 행정수도, 최소한 행정중심도시의 위상에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는 지는 모르나, 그런 생각 자체가 지방분권화와 균형발전의 대의에 부합하지 않는다. 정말로 균형발전을 원한다면 중앙정부 소재지의 이전이 아니라 그 권한·기능·역할의 대폭적인 이양을 요구할 일이다.

부산을 비롯한 다른 지역의 입장에서는 행정수도 혹은 행정중심도시의 기능이 서울에 있으나 세종시에 있으나 불편하긴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행정과정이 지역 내에서 이뤄지고 마무리되게 하는 것이야말로 균형발전의 제1보이자 분권화의 진면목이다. 그리고 바로 지금이 그 일을 시작할 때다.

[2009. 10. 17 부산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