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광-'애국주의' 화두가 잊은 '비민주공화국' 정치현실


동문특별강좌 이택광-'애국주의' 화두가 잊은 '비민주공화국' 정치현실

작성일 2009-08-13
▲이택광(모교 영문학 교수)

장은주 교수와 권혁범 교수 사이에 오간 말들을 잘 읽었다. ‘민주적’ 애국주의에 대한 권 교수의 우려에 공감하면서 논의를 좀 더 밀고 가볼까 한다. 원래 장 교수의 의도는 국가에 대한 진보진영의 원칙론을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해체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발단이 된 장 교수의 기고문(<한겨레> 7월23일치)을 보면 이 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요약하자면 장 교수의 주장은 ‘진보도 대한민국을 사랑하자’는 건데, 내 생각에 도대체 이 ‘사랑’이 모호하다.

물론 장 교수는 대한민국의 모든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소위 뉴라이트의 ‘대한민국주의’를 비판한다. 장 교수 입장에서 “뉴라이트의 대한민국주의는 제대로 된 애국주의”일 수 없다. 그 이유는 “비민주적이고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그 근본에서 부정하는 반-대한민국주의”이기 때문이다. 이런 진술을 토대로 유추했을 때, 장 교수가 말하고 있는 ‘애국주의’의 속성을 규정하는 것은 바로 ‘민주주의’이다. 말하자면, 장 교수가 긍정하고자 하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 것이다. 아니 다른 말로 표현하면, 민주공화국이어야 한다!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장 교수의 나라사랑은 당위명제이다. 그런데 그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이 당위명제가 사실명제로 별다른 증명 없이 자리바꿈하는 걸 목격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한국의 ‘진보적 민주주의자들’이 대한민국을 참된 민주공화국이라고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을 지적하면서, “자신의 나라가 많은 허점과 문제점을 갖고 있다고 해서 그 나라를 미워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진보적인 정치적 태도라고 할 수 있을까” 묻는 대목이 그렇다. 그런데 장 교수가 문제제기하고 있는 그 진보적 민주주의자의 태도야말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말을 당위명제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장 교수나 진보적 민주주의자들이나 사실은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장 교수는 진보적 민주주의자들과 동일한 가치판단을 전제하고 있으면서 왜 다른 결론을 도출하는 것인가? 기본적으로 장 교수가 논리적 혼란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장 교수는 지금 두 가지의 당위명제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어야 한다’는 명제와 ‘대한민국을 사랑해야 한다’는 명제를 아무런 고민 없이 그대로 치환해버리는 것이 장 교수의 논법이다.

겉으로 보기에 장 교수의 주장은 지금 여기 발 딛고 서 있는 대한민국을 긍정하자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에 다른 입장보다 훨씬 현실에 내려앉아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건 착시현상일 뿐이다. 장 교수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동원하는 하버마스와 로티의 실용주의적 관점들은 말 그대로 ‘실용적’이기 때문에 우리의 실정과 맞지 않는다. 하버마스가 유럽적 전통을 옹호하는 것이라면, 로티는 미국적 전통을 옹호하는 것이다. 그래서 각각 전자는 공화주의와 복지국가에서, 후자는 존 듀이의 이념에서 긍정적인 측면들을 추출한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들이 근거하고 있는 이런 ‘시민사회의 상식’을 한국에서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시민사회의 상식은 도래할 것이지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버마스나 로티가 유럽적 전통과 미국적 전통에서 진보적 논의를 출발시키고자 하는 까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전통이 ‘인민’의 경험으로 ‘국가’에 축적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나쁜 국가나 좋은 국가는 존재할 수가 없고, 국가는 초월할 수 없는 정치의 절대지평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장 교수의 고민은 이 지점에 맞닿아 있는 것이지만, 그의 주장이 힘을 얻으려면 애국주의에 대한 원론적 옹호와 ‘대한민국을 사랑하자’는 한국적 요구가 어떻게 서로 결합할 수 있는지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영문학
[2009. 8. 12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