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류-북관대첩비를 참배하고와서


동문특별강좌 정태류-북관대첩비를 참배하고와서

작성일 2005-10-13
北關大捷碑를 參拜하고와서

鄭 泰 柳 (법학58, 10회, 해주정씨대종회 회장,  변호사, 총동문회 명예 회장)

======== 북관대첩비는 하루빨리 한국으로 돌아와야 하고 전시하여 일본의 과거 침략사실과 만행을 널리 알려야 한다. 또 일본 정부의 책임 하에 안전하게 송환되어야 하고 원형대로 복원 건립하여야 한다. 다음으로 북관대첩비의 환국과 관련하여 임진왜란 당시의 함경도 지역 의병활동을 좀더 소상하게 밝히기 위해 남북한 간의 협조와 공동연구가 필요하다 =============

 지난 6월 제15차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북관대첩비를 일본으로부터 돌려받는데 상호 협력하기로 합의하였다. 앞으로 문화재청의 주관으로 양측은 일본과의 반환교섭과 북관대첩비 반환 후 어떤 식으로 북측으로 수송할지 등의 실무적인 문제를 협의하게 될 것으로 예측된다.  이에 앞서, 한국과 일본 정부는 북관대첩비를 한국에 넘겨주고 한국이 이를 북한 측에 전달하는 것에 합의하였다는 일본측 언론보도도 있었다.
 이로써 1978년 4월경 동경 한국학연구원장 최서면(崔書勉) 선생이 일본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의 한쪽 으슥한 곳에 쓸쓸히 서 있는 북관대첩비를 발견하고 이를 세상에 알린 이후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반환운동이 마침내 정부의 개입으로 조만간 그 결실을 보게 될 전망이다.

필자는 북관대첩비에 기록된 의병대장 충의공 정문부(忠毅公 鄭文孚)의 후손으로서 비의 환국 전에 역사의 현장을 살펴보자는 같은 후손들과 함께 2005년 6월 1일 야스쿠니 신사에 가서 신사의 관계직원들을 만나고 북관대첩비를 살펴보고 돌아왔다.
 북관대첩비가 야스쿠니 신사에 있게 된 경위에 관하여 신사측이 미리 준비한 문건을 보니 「러일전쟁 당시 함북지역에 진출한 후비 제2사단 17여단장 이케다(池田正介)소장이 현지에 있는 이 비를 발견하고 ‘일본은 조선국의 독립을 위해 청일, 러일전쟁 등 두 번이나 전쟁을 하였는데 지금은 다행히 교전의 목적을 달성하여 조·일 양국의 친목을 영원히 유지하게 되어서 이러한 비가 존재하는 것은 양국간의 감정을 해하는 원인이 된다.’ 고 해서 일본으로 송부하여 역사상의 참고자료로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지방관리를 통해 비를 세운 사람의 자손들로부터 후일을 위하여 승낙의 증서를 받고 육군성 앞으로 송부, 도착 후에는 신덴후(振天府: 전리품 보관 전시장) 혹은 유슈간(遊就館: 일본 최초의 군사박물관)에 봉납하고 싶다고 상신하였다. 육군성은 이 비를 전리품이 아니라 유슈간 내에 있는 고기물(古器物) 역사상의 참고품(參考品)으로 전시하기로 하여 유슈간은 1906년 4월 2일 이케다 소장으로부터 기증받았다」라고 되어 있었다.
  야스쿠니 신사의 위 문건을 보면 이케다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일으킨 것은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전쟁한 것이라고 우기고, 또 비를 일본으로 옮기는 의도가 임진왜란 당시의 패전기록을 은폐하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한일간의 친목을 유지하는데 장해를 제거하는 곳이라고 우기며, 또한 총칼로 위협하여 비석을 강제로 약탈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비를 세운 사람의 자손들의 승낙을 받고 가져간 것으로 강변하고 있어 제국주의 군국주의 시대의 일본의 대조선관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어서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또한 그러한 문건을 제시하여 이케다의 표현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있는 듯한 야스쿠니 신사의 태도도 과거사에 대한 반성이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필자는 일제 조선총독부가 1943년 8월 18일자 “반시국적 고적”의 철거령을 내려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 사명대사비(四溟大師碑) 건봉사의 기적비(紀蹟碑) 이순신 장군의 대첩비 등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여 부셔버렸는데 북관대첩비가 남아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케다의 공이라고 말해 주었다.

  북관대첩비는 당초 야스쿠니 신사 경내 현재의 유슈간 부근(신사 정문을 들어가서 우측)의 한쪽 비둘기 집 옆에 있었는데 유슈간의 신관을 지으면서 현재는 신사의 본전(本殿) 남쪽의 쇠울타리 안으로 옮겨져 있다.
 비의 이수(?首: 개석), 비신(碑身) 구부(龜趺: 대좌)를 살펴보니 본래의 이수와 구부는 버리고 비신만을 일본으로 가져와서 제멋대로 개석과 대좌를 새로 만들어 세운 것이 확연하였다. 비신의 상단과 하단의 일부가 상하여 시멘트로 때우고 메운 흔적이 있는데 그것은 일본에서 개석과 대좌를  만들어 비신을 세울 때 시멘트를 사용한 것으로 보였다. 비신 후면에는 선형의 흠집이 있었으나 최근에 생긴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야스쿠니 신사 관계자는 북관대첩비가 당초 그들이 인수할 당시의 상태 그대로 잘 보존되고 있으며 외부인이 함부로 훼손하지 못하도록 쇠울타리 안에 봉안하고 나무 비각을 세워 비를 피할 수 있게 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필자가 북관대첩비가 함경도 임명역에 있을 당시의 상태를 알 수 있는 사진, 기타 자료가 있는지 물었으나 그들에게는 그러한 자료가 없다고 대답이었다. 그리고 최근의 북관대첩비 송환문제에 대하여는 남북한 간에 합의하고 일본 정부를 통하여 요청하면 언제든지 반환한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최근 북한 또는 조총련 측으로부터 북관대첩비와 관련한 요청이나 방문 또는 언급이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전혀 그런 사실이 없다고 하였다.
 
  북관대첩비를 참배하고 생각한 것은 우선 북관대첩비는 하루빨리 한국으로 돌아와야 하고 북한의 원 위치에 다시 세운다고 할지라도 일단 그동안 반환운동을 전개하여 온 많은 분들과 특히 후손들의 노력과 정성을 고려하여 상당기간 국내에 전시를 하여 일본의 과거 침략사실과 만행을 널리 알려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북관대첩비는 일본군 이케다 소장이 강탈하여 일본으로 가져간 것이므로 일본 정부의 책임 하에 안전하게 송환되어야 하고 또한 원래의 모습을 고증하여 원형대로 복원 건립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북관대첩비의 환국과 관련하여 임진왜란 당시의 함경도 지역 의병활동을 좀더 소상하게 밝히기 위하여 남북한 간의 협조와 공동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함경도 지역은 원래 나라의 은덕이 적고 소외된 곳이라 왜군이 들어오자 피난 온 왕자와 대신을 잡아서 적에게 바치고 왜국의 벼슬을 얻어 날뛰는 반역의 무리들이 많은데다가 북쪽 여진족의 침범이 잦았다. 그때 북평사 정문부(鄭文孚)를 중심으로 경성의 이붕수(李鵬壽), 최배천(崔配天), 지달원(池達源), 강문우(姜文佑) 등이 의기로써 일어나 1592년 9월에 국세필, 국경인 등 반역의 무리를 베고 경성 길주 임명 쌍포 등지에서 차례로 왜적을 무찌르고 1593년 1월에는 단천으로 쳐들어오는 가토오기요마사의 왜군 2만 명과 싸워 물리치서 마침내 함경도 일대가 전부 수복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관찰사 윤탁연(尹卓然)은 왜군이 들어오자 병을 핑계로 갑산 별해보로 들어가 숨어 있다가 의병들이 일어나 거듭 승전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뒤늦게 나타나서 자기의 부하인 정문부의 공적을 시기한 나머지 임금에게 의병들의 공로를 숨기고 거짓말로 아뢰었기 때문에 정문부를 비롯한 의병들에게 제대로 포상이 되지 않았다. 그 후 전쟁이 끝나고 근 60년이 지나 1664년(현종5년) 북평사 이단하(李端夏), 감사 민정중(閔鼎重)이 그 지역 백성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말과 기록을 모아 의병들의 빛나는 공적을 정리하여 이듬해 경성 어랑리에 사당을 세워 봉향하고 조정에 고함으로써 비로소 실상이 들어난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북관의 의병활동에 대한 연구는 매우 미진하였고 특히 남쪽에서는 역사의 현장에 접근할 수 없어서 그 연구 성과도 미미한 형편이다. 그러므로 이번 기회에 남북의 학자들이 의병의 활동현장을 직접 답사하고 기록을 상고함으로써 북관 의병들의 활동을 깊이 연구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