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문화유적 답사 ③


동문특별강좌 북한 문화유적 답사 ③

작성일 2005-03-15

북한 문화유적 답사 ③

천대받는 고구려 문화(高句麗文化) -  정진철(정외9회, G.A.C 대표이사)

우리 일행은 교과서에서만 배웠던 고구려 땅을 밟았다. 그곳에는 우리 조상의 얼이 담긴 흔적들이 산적해 있었다.  우리는 고구려의 첫 도읍지였던 환인(桓因·현재 중국 길림성)과 두 번째 수도였던 집안(集安)을 답사하기로 했다.
  환인현(桓因縣)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주몽이 기원전 37년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고구려라 정한 후 동명성왕에 올라 18년간 통치를 한 곳으로 비류골 졸본, 현재는 압록강 지류중 훈강 유역이다.  해발 820m의 천연 요새로 당시 모습대로 보존된(오녀산성) 밑으로 훈강이 흐르고 있는데 중국정부가 이곳을 공개하는 것을 꺼려해서 원거리에서만 볼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의 초대 도읍지였던 환인지구는 1990년 중국정부가 만족(蠻族) 자치현(自治縣)으로 지정을 했는데 이는 소수민족의 자치현을 지정하려면 전체 인구중 20%가 넘어야 한다는 원칙에 벗어난 것이었다.  중국정부가 이곳을 만족 자치현으로 지정한 것은 이 지역이 고구려의 옛 땅이었으므로 조선족 측에서 영토를 돌려달라는 요구를 해 올 것을 우려해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한 배려 때문이라는 인상이 들었다.
  환인에서 통화(通和)를 거쳐 노령산맥을 넘어서면 길림성 집안(集安)에 닿는다. 이곳은 2대 유리왕이 천도하여 20대 장수왕까지 고구려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전기와 중기에 걸친 정치, 문화, 경제의 메카인 일대에는 1만 2천여개의 고분이 산재해 있는데 석분묘로 된 것이 특징이다.  남동쪽으로 압록강 건너 북한의 자성군 초산면 만포시와 마주보고 있고 압록강과 훈강의 수로교통, 내륙과 연결되는 육로 및 북한과 이어지는 철도가 부설되어 있다.
  집안 시내에 있는 국내성(國內城)은 평지에 쌓은 토성으로 기록에는 남북에 각 1개, 동서에 각 2개씩 모두 6개라고 되어 있다.  이번에 본 것은 서쪽 성벽이 겨우 남아 있고 성터는 아파트촌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색이 바랜 표지판 하나가 유일하게 이곳이 2천년 전의 "國內城"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집안 역사박물관은 중국정부에서 세운 것으로 중국어로 설명을 하고 우리말로 통역을 했는데 이들의 설명에 따르면 고구려가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기 전까지는 독립된 민족이 아닌 중국에 속한 소수민족의 하나였기 때문에 이 유적은 중국의 것이라는 기막힌 사연이었다.
  장군총(將軍塚)은 도읍을 집안에서 평양으로 옮긴 고구려 20대 장수왕(長壽王)의 묘로 추정되는 무덤이다. 동방의 금자탑이라 불리우는 장군총은 서기 413 - 490년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1천 1백여개의 화강암으로 계단식 사각형으로 만들어 쌓은 소형 피라밋 형태로 되어 있다. 그러나 도굴로 인하여 누구의 무덤인지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왕릉(王陵)이 아닌 총(塚)으로 불리우는 것이 우리를 안타깝게 했다.
  집안에는 벽화가 그려진 고분이 20여개가 있다. 이중 유일하게 중국정부가 공개한 것이 5호 묘중 제5호이다. 7세기의 전형적인 벽화양식에 따라 청룡백호(靑龍白虎) 주작현무(朱雀玄武)의 사신도(四神圖)가 사방 벽에 그려져 있고 돌 위에 그려진 그림도 1,3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하다.
  광개토대왕비는 서기 414년 장수왕이 그의 아버지 19대 광개토대왕의 치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비로 장군총에서 약 50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높이 6.39m, 무게 37t,  넓이 15m의 크기에 4면 1775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현재는 그 일부가 지워져 1,560자만 남아있고 비문조작 논란을 의식한 듯 중국정부에서 특히 비문 앞에서는 비디오 촬영을 금하고 광개토대왕의 생존시 칭호도 영락대왕이었으며, 사후 묘에는 국강상 광계토경 평안 호태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곳 사람들은 이 비를 호태왕비 또는 태왕비로 부르고 실제로 광개토대왕비라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다.
  바로 50여 미터 인접해 있는 조선족 소학교가 있었는데 그들도 태왕능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아예 비석조차 세우지 않고 허물어져가는 방치된 돌무덤이 왕릉의 모습이라니 참으로 개탄스럽기 한이 없었다.  우리는 중국당국에서 모르게 광개토대왕릉에 머리를 숙여 정갈한 마음으로 헌다식을 올리고 힘없이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 1999년 12월 (131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