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문화유적 답사 ②


동문특별강좌 북한 문화유적 답사 ②

작성일 2005-03-15

북한 문화유적 답사 ②

고구려(高句麗) 역사(歷史)의 증언(證言) - 정진철 (정외9회, G.A.C 대표이사)

  한 나라가 망한다는 비극적인 사태는 그것이 역사의 멸실(滅失)이라는 점에서 더 심각하게 작용한다.  역사적 기록은 약탈자에 의한 파괴로 소실되고 능묘도 도굴된다.  고구려의 멸망도 그러했다. 광활한 동북부의 대륙을 경략(經略)했던 강국(强國)이 일조(一朝)에 붕괴되어 처절한 모습만을 남겼다.  고구려사(高句麗史)의 규명(糾明)이 어려운 것도 그 때문이다.
  현재 남아있는 고구려사의 기록마저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외에는 중국의 사서(史書)에서 얻은 것이 고작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고구려의 고토(古土)인 집안(集安)이 고구려사의 귀중한 보고(寶庫)가 된다.  지금은 비록 중국 땅으로 바뀌어 푸대접을 받고 있지만 그곳에는 유적과 능묘가 많이 남아 있다.  현재 길림성에 속해 있는 집안은 고구려의 문화와 정신의 고향이요 상징인 것이다. 그곳에 있는 수많은 고분들은 특히 광개토대왕비와 장군총 그리고 고분의 벽화 등이 단절된 고구려의 역사를 이어주고 있다.
  중국 길림성 집안에 있는 고분박물관에 따르면 고구려 초기의 적석묘(積石墓)가 시조인 주몽의 꿈에 졸본 부여의 역대 왕들이 찾아와 나라 건국을 축하하면서 돌 하나씩을 주고 돌아갔다. 그것이 계단처럼 쌓여 일곱 계단의 산이 되었다.  신하들이 해몽하기를 하늘의 아들인 대왕이 그 석대(石臺) 위에 앉아 기다리면 하늘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주몽이 그렇게 하자 과연 잠시 후 구름이 내려와 감싸더니 황룡이 태우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 후로 역대 왕들도 경치 좋은 곳에 하늘로 올라가는 돌담을 쌓았다. 그래서 귀족들도 뒤를 따랐다는 전설이 있다.  현재 집안에 있는 일대의 고분은 약 1만 2천여 기(基)가 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 고분들은 야산처럼 변한 곳도 있고, 옥수수 밭, 과수원, 민가(民家) 근처 등 어디를 가나 볼 수 있었다.
  이처럼 고분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은 당시 고구려의 국력이 얼마나 왕성했던가를 보여주는 것이지만 아깝게도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거의가 도굴되어 온전하게 보존된 것이 거의 없다.
  중국 당국은 이들 고분을 우산(禹山), 산성하(山城下), 만보정(萬寶汀), 칠성산(七星山), 마선(麻선), 하해방(下解放) 등 여섯 개의 묘역으로 구분해서 관리하고 있다.  이중 우산과 용산 아래에 좌정한 우산 묘구에 장군총, 광개토대왕 능, 벽화로 유명한 무용총, 각저총 등이 집중되어 있다.
  우리는 장군총을 향하는 길에 오희분을 찾았다. 오희분은 마을 한 가운데 커다란 다섯 개의 토분이 자리하고 있는데 각각 네모 반듯하게 담장을 쳐 비교적 보전을 잘 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인 오효묘가 현재 유일하게 개방되고 있는 벽화무덤이다.  봉분 둘레가 약 1.5m.  높이가 약 5m로 된 7세기초 고구려 후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오효묘의 육중한 철문을 열고 묘실 안쪽으로 들어가 보면 벽면 가득히 그려진 고구려의 옛모습을 대하게 된다.  바닥에는 3기의 석판 관대가 놓여 있고 벽과 천장에는 당장이라도 살아 움직일 듯한 각종 형상물들이 그려져 있다.  용과 뱀이 서로 겨루고 있고 악기를 만드는 장인과 악기를 타는 선녀 등 그야말로 장관이다.
  무덤이 조성된지 1,400여 년이 지난 지금 여름이면 빗물이 흥건하게 스며드는데도 채색이 찬연하다. 이러한 고분 벽화가 아니었으면 그처럼 장엄했던 고구려의 실체를 어찌 접할 수 있었겠는가.  단동, 관전, 환인, 통화, 집안 등 드넓은 요동반도를 호령하던 동북부 지역의 강국, 대륙을 향한 원대한 꿈을 펼치며 국위를 떨쳤던 고구려가 지금은 남의 나라 땅이 되어 간신히 역사의 흔적만을 간직하고 있다.
  게다가 우리의 입장과는 달라서 고구려를 독립적인 고대 국가라기보다는 중국 내의 한 부족 국가라는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중국 당국의 경계속에 그 유적조차 떳떳하게 볼 수 없는 안타까움을 안고 다만 이곳이 우리 선조들의 얼이 깃든 한국역사의 흔적이라는 것만 확인하고 돌아서는 일행의 마음은 어딘가 씁쓸하기만 했다.

- 1999년 9월 (128호) 게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