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기행(25)


동문특별강좌 인도기행(25)

작성일 2005-02-19

< 인더스문명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모헨조다로 박물관 >

이윤희 (사학21회. 문학박사. 서일대학교 교수)
 
-----  인더스 문명의 중심지였던 그 자리에 도시 구조와 생활 모습을 함축해 놓은 박물관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모헨조다로는 발굴과 보존, 그리고 조사연구가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는 고고학 발굴지 이다.
발굴의 현장은 아직도 발굴의 삽 소리가 들리는 듯 하였다.
모헨조다로 박물관은 모헨조다로 유적지에서 걸어나오면 입구 왼쪽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넓은 도로에서 박물관 건물 쪽으로 곧게 뻗어있는 넓지 않는 길가에는 유두화 꽃과  흡사한 꽃나무들이 군데군데 아름답게 피어 있어 머나먼 여행길 피로를 가시게 하고 낯선 곳에 대한 경계심도 풀어주고 있었다.
박물관 건물밖에 책상을 두고 그곳에 앉아 관람자를 맞이하던 구리색 피부의 파키스탄인, 그곳에서 간단한 팜픔렛을 구할 수도 있었던 소박한 모헨조다로 박물관 전경이 지금도 눈에 선 하다.
아직까지도 문자 해독이 되지 않아 수수께끼에 싸여있는 4500년 전 절정기에 이르렀을 고대 도시 모헨조다로 유물을 직접 볼 수 있다는 호기심에 성큼성큼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층으로 된 박물관에는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답게 인더스 문명의 실재를 증명한 모헨조다로 유물로 가득히 진열되어 있었다.
이층 계단으로 오르는 벽면에 당시의 모헨조다로 도시 모습을 재현시켜 놓은 대형 그림이 걸려 있었는데 그렇게 크고 높은 성이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일어날 만큼 도시구조는 훌륭했다. 그 그림은 붕괴되었다가 재건되기를 일곱 번이나 반복했던 <죽음의 언덕>이라는 의미의 매우 훌륭한 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넓고 곧은 도로로 연결된 바둑판 모양의 도시구조를 이루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유물로서는 상아 및 보석을 재료로 한 목걸이, 팔찌, 반지, 귀걸이, 또는 염주로 보이는 장신구가 많이 발견되며 은, 구리, 청동으로 만든 그릇과 각종 무기가 있고 장난감과 바퀴 달린 수레가 보인다.
재미있는 것은 주변에서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는 황소수레, 떠다니는 배, 주전자, 장난감들은 그 옛날 모헨조다로 시민이 사용했던 것들과 아주 닮아 있다는 것이다.
작은 돌 화살촉, 돌칼, 돌접시, 집의 천장 구석에 둘러진 돌장식, 공 모양의 둥근 돌을 망치대신 사용했고, 발굴된 밀은 검은 색으로 변해 있었다.             
동으로 만든 낚시바늘, 동도끼, 동창, 동으로 된 단도, 동화살촉 등 모헨조다로인들은 금, 은, 동, 청동을 사용했고 구리를 많이 사용하여 연장이나 장신구를 만들어 사용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발굴된 어느 유적에서도 철은 발견되지 않았다. 인더스 문명은 인도에서 동기시대(銅期時代)의 대표적 문명이며, 철기시대에는 아리아족이 들어오면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인더스 문명이 시작된 연대에 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지만 <인도 고고학의 아버지>이며 모헨조다로 유적의 발굴을 지휘했던 존 마샬을 비롯한 대부분의 학자들이 대부분 기원전 3000년경으로 보고 있다. 인더스 문명은 적어도 일천 여 년 동안 성장하면서 훌륭한 문명을 발전시키다가 붕괴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본다면 인더스 문명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연대보다 조금 늦은 느낌이 있지만 분명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부인 할 수 없다.             
요리그릇, 접시, 후라이 팬, 5센티 길이의 동으로 만든 바늘 등의 모양은 4500여 년 전이나 오늘날에도 같은 모양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음도 발견된다.
흙으로 만든 컵, 흙 장식 받침, 꽃병, 여러 모양의 도기, 색을 넣은 엷은 주홍의 채색토기, 흙으로 만든 커다란 솥, 항아리, 뮤직드럼, 입이 넓은 독, 사방이 일미터 오십이나 된 커다란 함지그릇 등이 모두 흙으로 만들어져 있다.
모헨조다로 문자가 새겨진 작은 항아리, 물을 담아놓고 먹은 주전자, 밀크를 담아놓고 마셨던 그릇, 돌을 사용해서 무게를 달았던 각종 크고 작은 돌 추, 주사위, 체스 등은 인더스 문명인들의 문화생활 수준을 짐작케 해주고 있다.
뼈로 만든 장식품, 조개껍질로 만든 장신구 외에도 모헨조다로 발굴 팀에 의하면 기원전 3000년경에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금, 은, 동, 도자기 같은 것으로 치장하고 다녔다. 목걸이, 머리벨트, 반지를 매우 흔하게 사용했고 귀걸이는 남녀가 동시에 사용했다.
손톱 깎는 기구, 화장품 류, 거울, 염주, 상아로 만든 빗도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것처럼 정교했다.
구멍이 아홉 개인 돌로 만든 시계, 작은 구멍이 다섯 개인 돌로 만든 미터기가 모헨조다로인들의 과학수준을 대변하는 듯 하고 춤추는 소녀상(델리 박물관 소장이 진품)등 예술적 감각이 뛰어난 조각품이 많다.
유약을 바른 도자기 작품 중에는 여성 특히 나체조각이 많고 어머니神과 관련하여 多産을 강조하고 있다. 地母神이나 男神, 또는 성스러운 소와 나무 등의 모습을 한 유물들도 있었다.       
풍자적인 형상이나 몸을 뒤틀고 있는 요염한 무희의 청동 상, 목을 흔드는 동물, 노끈으로 끄는 조그만 손수레 등과 같은 매력적이고 깜찍한 데라코타 장난감도 있다.
유물과 관련하여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인장이다.
상업과 관련된 듯한 수많은 인장이 모헨조다로에서만 천 개 이상이 발굴되었다고 하는데 이 인장의 모양은 대개는 사각형인데 둥근 것도 있다. 인장의 대부분은 돌로 만들어져 있는데 아주 곱고 매끄럽고 정교하여 놀라웠다.
일 평방 인치 내외의 크기로 된 인장은 약 2천 개나 발견되는데 동석(凍石)을 재료로 하여 정교한 솜씨로 윤을 내어 조그마한 음각의 조각물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것들은 부드러운 물질 위에 도장찍기 위해 각인을 한 가락지처럼 사용되었거나 또는 몸에 지니고 다니는 부적이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그 용도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히지 못하고 있다..
똑같은 모양의 인장이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5백여 개나 발견된 점으로 보아 이것은 무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아마도 이것들은 상인들의 통행증 역할을 하였거나 혹은 상품의 수령증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일반적으로 추측하고 있다.
도장에는 많은 그림과 부호가 새겨져 있다. 이것들은 틀림없이 그 시대의 문자일 것이며 약 4백 개의 다른 모양을 보여주고 있다. 이 문자는 음을 나타내고 있으며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으로 써 나갔다. 물고기 그림이 가장 많이 나오지만 도장의 그림을 통하여 볼 때 인더스 문명인들도 코끼리, 호랑이, 물소, 코뿔소, 악어 등을 알고 있었으며, 또한 이는 당시 이 지방이 오늘날과는 달리 습하고 숲이 우거진 환경이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도장에 새겨진 문자는 인도의 다른 고대문자와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다른 세 곳은 이미 고대문자를 판독해 낸지 오래지만 인도의 경우 많은 학자들의 연구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분명히 읽어 내지 못하고 있다. 이 문자가 판독된다면 인더스 강 유역의 정치사가 훨씬 많이 규명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곳 박물관에도 꽤 많은 인장이 전시되어 있지만 인도 뉴델리의 국립박물관에 비하면 소량에 불과하다. 뉴델리 박물관에는 인더스 유물전시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고 거기에 수많은 인장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것은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 독립되기 전인 20여 년 전에 모헨조다로 유적이 발굴되고 보니 당시 수도인 뉴델리의 국립박물관에 대부분의 유물이 전시되게 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박물관에는 모헨조다로 유물이 대부분이지만 꼬트디지, 암리, 하라빠 유물도 약간씩 진열되어 있어 비교하면서 보았던 것도 유익하였다.
모헨조다로 공항으로 향했다.
아침에 모헨조다로 공항에 도착했을 때 친절하게 대해주던 그 신사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나는 카라치에서 내일 아침에 돌아가는 항공표를 살 수 밖에 없었지만 오늘 오후 비행기로 커라치로로 되돌아가기를 희망한다고 아침에 모헨조다로에 도착했을 때 말했더니 도울 수 있는 길을 힘껏 찾아 주겠다고 말했던 그 사람이다.
"오늘 모헨조다로는 어떠하였습니까”하고 묻는다. 나는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말하니 그는 공항에 놓여있는 의자에 앉기를 권한다. 자신은 카라치에서 멀지 않는 대학의 석사라고 하면서 교수를 제일 존경한다든지, 파키스탄 경제사정이 좋지 않다든지, 실업문제가 심각하다는 등의 대화를 나누었다. 또 한눈으로 보아 그 지역의 유지인 듯한 사람을 소개해 주는데 선량해 보이는 사람으로 오후에 카라치로 돌아갈 수 있도록 많은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오늘 오후 비행기 좌석 형편은 좋지 않지만 어떻게든 표를 마련하겠다고 하면서 애써 주었다. 두 사람의 도움으로 오후 비행기로 카라치까지 되돌아 올 수 있었다. 만약 그곳에서 하루를 숙박 할 경우 대단한 어려움이 예상되었다. 그 부근에서 제일 가까운 도시인 라르까나 까지는 25킬로미터의 거리이고 모헨조다로 주변에 호텔은 하나도 없다. 게스트하우스라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헨조다로 공항을 떠나 다시 인더스 강을 내려다보며 카라치로 향했다.
어두워 졌다.
영롱한 보석들이 지상에 뿌려지기 시작한다.
카라치 시가 어두워진 지상에 아름답게 드러난다.
조약돌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불빛은 황홀한 야경을 펼치고 여행길 나그네는 천상에서 지상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였던가.

- 1999년 12월 (131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