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특별강좌
인도기행(24)
< 훌륭한 도시구조를 갖춘 모헨조다로의 壯觀 >
이윤희 (사학21회. 문학박사. 서일대학교수)
-------- 온통 벽돌로 만들어진 바둑판 모양의 도시구조는 현대인의 눈으로 볼 때도 감탄을 불러일으키게 만들고......,
1922년에 발굴된 모헨조다로는 하라빠와 더불어 인더스 문명권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인더스 유역의 문명은 대략 기원전 3000년에서 기원전 1500년까지 번성했었다. 여러 해 동안의 발굴 결과 모헨조다로는 로마제국 이전으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로 밝혀졌다. 모헨조다로가하라빠와 그 주도권을 공유하고 있었던지 어떻든지 간에 모헨조다로는 분명 인더스 문명의 중심지였다.
인더스 강 유역은 생태학적으로 볼 때 서양문명의 요람인 이집트의 나일강 유역이나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유역과 유사한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강우량은 적었지만 히말라야 만년설이 녹아 내린 물로 수량은 그런 대로 풍부하여 주변에 경작지를 크게 이룰 수 있었고 때때로 홍수의 범람이 가져다 준 충분한 침적토(沈積土)가 자연적인 비료의 역할을 하여 농사짓기에 편리한 곳 이였다.
하라빠 유적은 1856년 영국인 브룬튼 형제가 카리치와 라호르 사이의 철도 부설 공사를 하다가 처음으로 발견하였지만 이 유적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된 것은 1920년 이였으며 2년 후에는 모헨조다로에서도 고고학적 발굴이 착수되었다.
하라빠·모헨조다로가 발굴되기 전 인도역사의 시작은 기원전 1500년경에 머물렀는데 영국인 고고학자 존 마샬과 인도인 고고학자 라칼다스 바너지 등의 지휘로 인더스 강 유역의 고대 유적이 발굴됨으로써 인도역사시대의 시작을 기원전 3000 년경으로 올려버렸다.
1927년에 가면 존 마샬이 그의 후임자로 미국인 고고학자 어네스트 멕케이를 모헨조다로 발굴 책임자로 지명한다. 1931년에 "낮은 도시"의 발굴이 완성되고 멕케이는 일직선상의 도시 구조 망을 발굴해냈다.
1930년대는 경제적인 침체로 고고학적 발굴이 지지부진했고 2차대전이 시작되면서 중단상태에 들어갔다.
1947년 인도·파키스탄이 분리 독립되자 고고학적 조사발굴이 각각 분리되어 진행되었다. 파키스탄에서는 모티어 휠러가 1945년과 1950년에 하라빠와 모헨조다로를 발굴했다.
두 도시 이외에도 꼬트디지, 칼리망간, 루빠르 등 여러 곳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또 최근에는 메르가르 유적과 암리 유적이 발굴되었다. 그 동안 여러 유적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이 진행되어 왔고 해가 갈수록 발굴된 유적은 점점 더 많아질 것이지만 아직까지 가장 중요한 곳은 모헨조다로와 하라빠 유적이다.
인더스 문명이라고 불리는 이 문명권은 단순히 인더스 강 유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모헨조다로와 하라빠는 가장 큰 도시로써 그 크기가 각각 2.5평방 킬로미터이며 인더스 문명권의 범위는 히말라야 산록에서 아라비아해에 이르는 1600킬로미터와 동서로 펀잡 지방을 가로지르는 1100킬로미터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걸쳐 있다. 인더스 문명의 중심인 하라빠와 모헨조다로사이의 거리만도 6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다. 지금까지 발굴의 결과로 알려진 인더스 문명권은 파키스탄의 펀잡, 발루치스탄, 신드, 인도의 라자스탄, 펀잡, 까티아와르에 걸치는 지역으로서 약 50만 평방 마일에 70여 곳의 유적을 포함하고 있어 그 규모로 보아 세계문명 발상지의 어느 곳보다도 그 범위가 넓다.
더운 줄 몰랐던 아침의 태양이 한낮이 되자 달구어지면서 뜨거워지기 시작한다. 유적지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신발은 미세한 흙으로 완전히 덮여버렸다.
유적지를 카메라에 담았다.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중의 한 곳, 인더스 문명의 중심지 모헨조다로 현장에 찾아와 있다는 사실은 붉은 태양이 내뿜는 45도의 이글거리는 열기도 잠시 잊게 만들었다. 역사는 역시 발로 공부해야 한다는 말은 진리였다.
차도르를 두른 이슬람교 여인의 가족으로 보이는 남자와 소년, 이렇게 세 사람이 모헨조다로 유적을 돌아볼 뿐이지만, 4500년 전 인류의 지혜를 볼 수 있는 문명의 산실은 뜨거운 태양과 적막감 속에서 인류 고대 문명의 진수를 드러내고 있었다.
<죽음의 언덕>이라는 의미의 모헨조다로는 붕괴되었다가 재건되기를 일곱 번이나 반복했던 매우 훌륭한 도시였음이 발견된다.
넓고 곧은 도로로 연결되어 있는 바둑판 모양의 정연한 도시형태다. 계획적으로 건설된 이 도시는 모든 유적이 붉은 벽돌로 이루어져 있다. 당시의 다른 세계에서는 집을 짓는데 있어서 나무를 엮어 흙벽을 만들거나 진흙 벽돌을 사용하였을 뿐인데 인더스 인들은 훨씬 견고한 구운 벽돌로 대부분의 집을 지었다.
가옥은 2층 구조였으며 공중 목욕탕이 군데군데 보이는데 커다란 목욕탕 바닥에 벽돌을 촘촘히 깔았고 벽도 역시 벽돌로 지어졌고 귀퉁이 한쪽에 구멍을 내어 목욕물이 빠져나가도록 정교하게 만들어 덮은 하수구 시설, 큰 곡창, 원주가 달린 대형 홀, 승려들의 숙소, 우물, 성채를 갖추고 있다.
인더스 강 유역의 고대 도시는 역사상 로마제국 이전의 어느 문명도시보다 훌륭한 배수시설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무더운 기후 조건하에서 모든 사람들이 밀집하여 생활 한데다가 공동우물 이외에 대부분의 집들이 독자적으로 우물을 갖고 있었으므로 도시를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배수시설이 매우 중요하였다. 집집마다의 하수는 도로의 하수구로 모여들고 이것은 다시 시 외각의 강으로 흘러가도록 설비되었다. 오물은 도관(導管)을 통하여 흘러가게 되었는데 이 도관은 벽돌로 만들어졌으며 메워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위를 돌로 덮어놓았다. 인더스 문명의 주인공은 도시를 깨끗이 유지하려고 노력했음이 발견된다.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가까이 멀리 인더스 문명의 잔해들이 무더기로 널려져 있다. 중심부의 발굴은 이미 마쳤고 그 주변을 발굴하고 있다. 부자들의 거주지역과 가난한 자들의 거주지역이 분리되고 그 뒤로는 매우 큰 도시의 흔적이 보인다.
가장 높은 곳에 불탑이 세워져 있는데 이 탑은 인더스 문명이 몰락한지 1600 년쯤 후에 폐허 위에다 쿠샨 왕조 때 세운 것이다.
훌륭한 도시를 건설했던 그들의 생업은 농업과 상업이었지만 대부분은 농사를 지었다. 주곡은 밀이었지만 보리, 콩, 참깨도 재배하였으며 로탈 유적에서는 쌀도 발견되고 있다. 대형 목욕탕 크기의 곡창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그들은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모헨조다로에서는 천 조각과 물레가 발굴되고 있으며 인더스 문명의 주인공들이야말로 최초의 목화 재배자 였다. 목화를 옷감으로 사용한 것은 인더스 인들이 세계문명의 발전에 공헌한 위대한 선물이었다.
신앙생활은 위한 것으로 보이는 성채도 마련되어 있다. 자연물 숭배의 형태를 찾아볼 수 있으며 신과 함께 코끼리, 호랑이 등의 동물이 그려져 있고 희생물을 바친 것을 알 수 있는 그림도 있다.
특히 주의를 끄는 것은 인장과 돌 위에 새겨놓은 그림에서 시바신의 원형으로 보이는 삼면신(三面神)을 발견할 수 있는 점이다. 수많은 동물들에 둘러 쌓여 요가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이 모습은 뿔 달린 머리모양을 하고 있고 몸통은 호랑이 가죽을 두른 채 팔찌를 걸치고 있다. 이 조상(彫像)은 위대한 시바 신을 밀림의 동물들을 물리친 승리자, 즉 백수(白獸)의 주인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바와 칼리 등의 현대 힌두 신이 보이는 것은 인더스 인들의 신앙생활이 오늘날의 힌두교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모헨조다로 유적에서는 윤회관(輪廻觀)과 같은 철학적 고리까지도 느낄 수 있는 점으로 보아 인더스 문명은 그 후 아리아 족에 의해 아주 단절된 것이 아니고 인도의 전통문화와 유기적 관계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굳건하게 정착했었던 문명을 도대체 무엇이 파괴해 버렸을까?
그 원인에 대해서는 몇 가지의 추측만이 가능할 뿐이며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첫째, 홍수로 인해 강이 범람하여 도시를 휩쓸어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다. 둘째는 과도한 경작이나 방목으로 인하여 경작지가 황폐화되었거나 혹은 벽돌을 굽기 위해 지나치게 벌목함으로서 산림이 파괴되어 탈수현상이 일어났을 것이다. 이러한 환경의 변화가 주변 지역을 불모지로 만들어 결국 인더스 문명을 몰락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셋째는 외적의 침입을 받아 멸망하였으리라는 추측인데 인더스 문명의 붕괴시기와 아리아 족이 인도에 침입한 때가 거의 들어맞는 점은 이 가능성을 한층 강하게 뒷받침해 주는 것이다.
힘들게 힘들게 세계문명의 발상지 인더스 계곡 모헨조다로에 찾아와 중심유적 군이 있는 언덕에 앉아 인더스 문명의 숨결을 호흡해 본다.
오늘 비록 짧은 시간 이곳에 머물지만 모헨조다로의 여정(旅情)은 영원히 나의 생에 기억 될 것이다.
- 1999년 11월 (130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