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특별강좌
인도기행(19)
< 佛敎學問의 중심지였던 나란다大學 >
이윤희 (사학21회. 문학박사. 서일전문대교수)
------ 나란다大學으로 가는 王舍城에는 佛陀의 苦行과
빔비사라王의 悲運이 서려있고.......
부다가야를 구경하고 가야로 갈 때는 조그만 버스를 이용하였다. 시간은 충분할 것 같지 않았지만 욕심을 내어 라지기르까지 가볼려고 결정했다.
가야역에서 라지기르까지는 60키로의 거리다. 택시를 찿고 있는데 막 출발 하려는 버스가 라지기르! 라지기르! 외치며 타라고 한다.
인도 버스는 예외없이 미어지도록 가득 태우고 승차문에 매달려 버스 뒤에 달라붙어 가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어떻게 된 셈인지 좌석이 남아 있다면서 나를 차안으로 떠밀어 올리는 것이었다.
말라깽이가 아니면 앉기 힘들 정도로 작고 비좁은 좌석에 등받이가 덜렁거려 앞의 좌석을 손으로 붙들고 정신을 바짝차리고 몸을 약간 앞으로 당기지 않는 한 여지없이 뒤로 넘어지게 되어 있었다. 통로는 서 있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버스는 거의 평지로 이어지는 도로를 제법 빨리 달리는 것 같지만 다급한 마음과는 달리 60키로의 거리를 두 시간에 걸쳐 도착시켰다.
라지기르에 가까워지자 인도 북부 평야지대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제법 큰 산들이 여기저기 시야에 들어온다. 꽤 험준한 바위 산들도 군데군데 나타났다. 라지기르市에 진입하기 직전 넘어서는 고개 좌우로는 제법 높은 산으로 둘러 쌓여 있다
라지기르는 부처가 활동할 당시쯤 강력한 힘으로 주변 지역을 압도했던 마가다 왕국의 수도였다. 라지기르는 지형적으로 천연의 요새임을 한눈에 느끼게 한다.
항상 인도 역사의 중심 무대였던 북부평야 지대에는 당시 수많은 조그만 국가들이 힘을 겨루면서 저마다 강력한 왕국의 발돋음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당시 북부 인도의 세력 판도는 16개 국가로 압축되었고 다시 4개 왕국으로 축소 된 것은 결국 북부 인도의 정치적 세력이 이들 몇 개의 유력한 왕국으로 통합된 것을 의미한다. 4개 국가는 마가다, 코살라, 밧트사, 아반티 이다. 그 중에서도 더욱 강력한 세력으로 주변지역을 병합하여 세력을 확대하고 있는 것은 마가다 왕국이었다.
빔비사라 ( b·c. 543 BC-d 491 BC ) 왕 때 마가다 왕국은 인도의 가장 강력한 국가로 발돋움하였다. 그의 왕국 확장 특히 동쪽으로 앙가 왕국을 병합한 것은 후에 마우리아 왕국이 인도를 통일하는데 기반을 마련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는 문화적인 업적을 위해 노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부처님의 친구이자 보호자였다.
그의 뒤를 계승했던 사람은 아자타샤투우 왕자였다. 그도 역시 마가다 왕국을 확장하고 공고히 하는데 크게 공헌한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부왕 빔비사라를 감옥에 가두어 옥사시킨 패륜아 였다.
라지기르는 현장과 혜초의 기록에 王舍城으로 기록되는 곳으로서 역사적 유적을 더듬을 수 있는 곳이지만 이곳에서 내가 특히 보고 싶었던 것은 그리다구타 였다. 이곳은 석가모니가 2년동안 고행했던 곳이다. 그리다구타는 호젓한 산길을 한참이나 올라간 후에야 찿을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다구타를 찿기위해 처음으로 방향을 잡았을 때 나타난 화려한 입구에 나는 상당히 당황하고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곳은 힌두성지와 유원지가 곁들인 곳으로서 비탈길을 올라가는데 리프트까지 장치되어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다구타는 옆으로 나있는 조그만 오솔길을 따라가야 했다. 아무도 오르는 이 없고 잡목이 우거져 있고 날씨는 흐려져 있어 몹시 음산한 느낌이었다. 숨을 헐떡이며 산길을 올라갔을 때 나타난 바윗돌이 그리다구타 였다. 석가모니가 바로 이 바윗돌 밑에서 2년동안의 고행을 경험한 곳이다.
안내판에는 이곳의 내력과 함께 현장법사를 비롯한 구법승들이 다녀갔었다는 것을 적어놓고 있었다.
아무리 고행의 길을 걸었다고 하지만 어떻게 이 바윗돌 밑에서 2년 동안이나 생활을 했을까?
비바람을 막을 수 있는 안온한 동굴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바람을 막을 수는 없고 겨우 위에서 내리는 비는 막을 수 있는 바윗돌이었다.
라지기르의 한 겨울은 위도상에서 볼 때 상당히 추운 곳인 것만은 틀림없다. 얼음은 얼지 않더라도 0도 가까이 기온이 내려가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울적한 마음으로 산에서 내려오면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빔비사라 감옥을 찾았다.
우리나라의 시골 옛집터와 다를 바 없는 돌담장의 형체만이 남아 있었다. 빔비사라王이 왕자인 아자타샤투우에 의해 이곳에 유폐되어 비운의 말년을 보냈던 곳이다. 빔비사라는 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석가모니가 구리다구타로 오르내리는 모습을 외롭게 바라보았다고 한다.
라지기르에서는 택시를 이용하여 나란다 대학으로 출발했다. 인도의 전형적인 시골길을 달리는데 델리쪽 보다는 비옥해서인지 수량이 풍부해서인지 보이는 땅들은 모두 경작되어 있다.
10키로쯤의 평평한 도로를 거침없이 달렸다.
비기 오기 시작하더니 이내 아스팔트 길이 젖는다. 비가 내리면 싫지않고 특히 여름철 비오는 날엔 생기가 날만큼 좋아하지만 여행중에 비는 언제나 좋은 것만은 아니다. 나란다에서처럼 유적지를 둘러보아야 할 경우는 비로 인해 불편을 겪게되고 흐린 날씨 탓에 유적지 사진은 선명하게 나오지 않는다.
나란다에 이르렀다.
미얀마 양곤에서 캘커타까지 함께 들어왔던 성지순례단을 나란다에서 또 마주쳤다. 이들은 틀림없이 부다가야와 라지기르를 거쳐서 여기까지 왔을 것이다. 내가 며칠간 캘커타에 머물렀던 것을 생각하면 이들은 나보다 훨씬 여유를 갖고 꼼꼼이 불교성지를 순례하고 있는 셈이다.
나란다는 비하르주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불교 승원으로서 보통 나란다 대학으로 일컫는다. 나란다의 전설적인 역사는 부처님과 자이나교 창시자인 마하비라 때까지 올라간다. 티베트 사료에 의하면 2∼3세기 때의 인도 불교 철학자였던 라가르주나(龍樹)가 그곳에서 공부를 시작했었다.
인도 고고학 발굴단에 의해서 이루어진 광범한 발굴조사가 보여준 바로는 이 승원의 창설은 5세기 굽타시대에 해당한다. 7세기 전반 까나우즈의 강력한 지배자였던 하르샤王이 이 승원을 발전시키는데 크게 공헌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의 治世 동안에 중국의 현장법사가 오랫동안 나란다에 머물렀고 그곳에서 공부한 과목들과 그 집단의 전반적인 모습에 대해서 분명한 기록을 남겼다. 1세기 후에 또 다른 순례자였던 의정 또한 승려들의 생활에 대해서 상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나란다는 팔라왕조(AD8∼12세기)때는 학문의 중심지로 계속 번영했을 뿐만 아니라 돌과 청동으로 만든 종교적 건축물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나란다는 아마도 12세기경 모슬렘이 비하르를 공격했을 때 유린되었으며 그 후 영원히 복귀되지 못했다.
순례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굽타시대부터 나란다 대학은 높은 담으로 둘러 쌓여 있었다. 발굴 결과 전통적인 인도 디자인으로된 열 개의 승원 기둥들이 드러나고 사방으로 열려진 직사각형의 구조물을 보여주고 있다. 이 승원들 앞에는 더 큰 사당과 벽돌로 만든 탑이 서 있다. 전체적인 건물은 그곳에서 발견된 도장에 바하비하라 대승원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그 옛날 法顯·玄 ·義淨·慧超와 같은 구법승들이 찾아갔던 나란다 대학을 둘러보았다.
법현은 15년에 걸친 여행을 하였지만 인도 영내에 체재했던 기간은 401∼410년간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인도 여행에 관한 기록을 남겼지만 불행히도 역사에 관해서는 큰 도움을 못 주고 있다. 인도는 범죄가 없고 평화로운 곳이며 국민성이 소박하고 통치형태가 온화하다고 기록하였다. 여행자를 위한 숙박소가 노변에 마련되어 있고 시설 좋은 무료병원도 있었다. 수도 빠탈리푸트라에는 소승 및 대승불교 사원이 있어 6∼7백명의 승려가 수도하고 있었는데 법현은 이곳에서 3년 동안 불법을 공부했다.
여행거리, 인도 체류 기간 및 여행기의 중요성 등에 비추어 볼 때 구법숭들 가운데 단연 으뜸은 현장이었다. 인도를 방문하여 불교에 대한 지식을 얻고 불경을 수집하려는 목적에서 길을 떠났던 현장은 중국 서쪽으로 방향을 잡아 사마르칸트를 거쳐 카블, 페샤와르의 길을 따라 인도로 들어갔다. 그는 불교 성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북인도의 주요한 지역들을 두루 거쳐 벵골까지 가서 데칸을 경유 남인도 마드라 부근의 깐치에 이르렀다. 서쪽으로 말와, 몰탄, 신드를 거쳐 다시 날란다 대학에 이르렀을 때 거의 인도 전역을 周遊한 그의 여행길에 놀라울 뿐이다.
현장이 남긴 <大唐西域記>는 당시 인도의 정치, 사법, 稅政, 군사력, 대외무역, 사회제도 및 풍습까지도 다양하게 기록해 놓은 매우 중요한 사료이다. 다만 그의 기록은 불교와 불교의 후원자였던 하르샤왕의 통치를 극도로 칭송함으로서 사료로서의 신빙성을 얼마쯤 흐리게 만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현장은 인도에 14년 머무는 동안에 다섯해를 불교 학문의 중심지로 묘사했던 나란다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굽타제국의 수도였던 빠탈리푸트라 보다 하르샤 왕국의 수도인 까나우즈 시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성곽으로 둘러쌓인 매우 번영하는 아름다운 도시로 기록하였다. 현장은 하르샤 왕에 의해 왕국이 잘 다스려지고 있으며 인도인들을 교육, 문학, 미술의 애호가로 묘사하였다. 현장은 중국을 떠날 때는 인도 여행에 대한 당나라 황제의 허락을 얻지못하고 슬그머니 빠져 나왔지만 많은 불경과 불상을 수집해 가지고 장안에 돌아갔을 때는 황제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나란다 대학은 굽타시대에 크게 번영하여 세계적 명성을 지닌 교육의 중심지였다. 나란다 대학은 5세기에 인도의 각지역 및 불교세력이 미쳤던 외국의 제왕과 부호들의 성금에 의해 설립되었다. 하르샤 왕도 나란다 대학을 적극 후원하여, 절을 세워 주기도 하였다. 나란다 대학은 현장 등 구법승의 기록 이외에도 생생한 遺址와 여러 碑銘에 의해서도 충분히 증명되고 있다. 학생수는 교수를 포함하여 1만명을 넘었다. 교수들은 가르치면서 또한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였다. 나란다 대학에서 공부했던 사람들은 인도, 동남아, 중앙아시아, 중국, 한국등 사실상 모든 불교국가에서 온 학자들이었다.
나란다 대학에서 10년 동안 공부했던 당나라의 의정은 이 대학에서 후이니에라는 한국승의 이름이 새겨진 것을 발견하였다. 의정은 우리의 혜초 스님보다 50년 먼저 구법승으로 인도를 방문하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혜초 스님 이전에 이미 한국의 구법승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하게도 혜초 스님은 라지기르에 대해서는 기록하였으면서도 가까이 위치한 나란다 대학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다.
나란다 대학은 적어도 여덟 개의 칼리지와 세 개의 도서관을 가지고 있었다. 주로 대승불교와 이에 관련된 과목들을 교수 했지만 그 외에 힌두교, 논리, 철학, 의학, 傳記, 베다학문, 심지어 마술까지 포함한 보편적 교육을 시켰다. 나란다 대학은 불교 뿐만 아니라 힌두교의 교리를 자유롭게 토의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나란다 대학은 인도에서는 쇠퇴해 가던 불교를 여러 나라에 보급 발전시키기 위해서 포교단을 조직하여 교육시켰다. 高僧들이 저술한 책들이 이곳으로부터 여러 나라에 보내졌다. 나란다의 학자 수바카라 심하는 8세기 초 중국에 가서 불경 번역에 종사한 일이 있었다. 불교 뿐만 아니라 인도문화가 7∼8세기에에 나란다 대학으로부터 아시아의 모든 불교국가에 전파되어 나갔다.
가야로 가는 버스 막차가 들어왔다.
이미 승객이 많고 몇 개의 빈 좌석 뿐이었다. 버스는 정류장에 설 때마다 내리고 오르는 사람들로 법적거린다. 달리는 버스가 갑자기 서더니 부르릉 거리는 소리만 되풀이 될뿐 움직이지 않아 덜컥 걱정이 되었다. 이 버스가 가야역 막차이고 보니 고장이 난다면 캘커타행 밤 기차를 탈 수 없기 때문에 큰 걱정이 되었다.
한참 후 버스는 움직이기 시작하고 어두운 밤길을 달려주었다. 나는 찾아가 보았던 가야·부다가야·라지기르·나란다 대학을 떠올리고 있었다.
어둠이 내리고 구멍가게들에 전기불이 켜지기 시작한다. 가야 기차 역에서 가장 번듯해 보이는 레스토랑으로 들어가 저녁식사를 주문하였다. 인도 청년이 와서 시커먼 행주로 식탁을 쓱 닦더니 그 행주를 식당 바닥 구석지로 싹 던지더니 얼마 후 다른 손님이 들어오자 아까의 그 행주를 집어 들고가 식탁을 닦는다. 차라리 닦지를 말것이지.
기차가 멀리 데라두움으로부터 달려오기는 하지만 또 4시간 연착하는 것이었다.
캘커타로 되돌아 가면서도 어제 밤에 가야까지 가면서 겪었던 고행길을 다시 겪으며 인도에서의 여행은 유럽에서의 여행보다는 열배쯤은 더 힘들다는 것을 느꼈다.
캘커타에 도착했을 때는 예정시간보다 5시간 연착이었다.
- 1998년 11월 (120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