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기행(14)


동문특별강좌 인도기행(14)

작성일 2005-02-19

< 인도의 상징적인 도시 켈커타 >

이윤희 (사학21회, 문학박사·서일전문대학 민족문화과 교수)

---- 켈커타는 인도의 후진성이 한 곳에 축약된 도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서부 인도의 관문이 봄베이라면 동부 인도의 관문은 켈커타이다. 봄베이는 '게이트웨이 오브 인디아'로서 영국의 제국주의 지배하에서 인도의 산물과 재화가 주로 봄베이를 통해 영국으로 들어 갔으므로 오래전부터 서구식의 번창한 상업도시로 발달하였지만 켈커타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였다.
켈커타하면 우리는 매스컴을 통하여 보고 듣은 바에 따라 더럽고 북적거리고 무질서한 도시의 표본으로 연상하게 된다.
나는 이미 인도를 몇 번째 찾아볼 수 있었지만 1997년도 교육부 학술진흥재단에서 지원하는 연구논문의 자료수집을 위해 인도를 방문해야 하는 기회가 다시 나에게 주어졌을 때 이번에는 켈커타를 통해서 인도의 참 모습을 엿보리라 마음먹었다.
미얀마 랭군에서 켈커타까지 비행시간은 하늘에 떠 있는 시간만 한시간 사십분이었다. 기내 승무원이 인디아 인터내셔널 신문을 가져다 주었다.
이번 여행동안 가는 곳마다 신문 방송이 한국 외환위기를 집중보도하고 있었지만 여기에도 한국 경제가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듯이 어둡게 실려 있었다. 나는 갑자기 피로가 엄습해 오는 것을 느껴  신문을 접어버렸다.
인도항공 여승무원은 큰 키이지만 날렵한 의상 사리 밑으로는 배꼽까지 드러낸 허리가 탐스럽다. 술을 잘 마시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시크교도 남자들에겐 미니술병을 두 개씩 서비스한다. 나는 그냥 예뻐서 받아 두었지만.
켈커타공항이 덤덤 에어포트에서 슈바스 찬드라 보스 에어포트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슈바스 찬드라 보스는 간디의 비폭력주의와는 반대로 폭력을 신봉한 사람이었다. 그는 파시스트 세력에 동조했던 사람으로 2차대전 중에 국외로 탈출해서 히틀러 정권에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가 다시 인도에 잠입하기 위해서 싱가포르로 향하다가 비행기가 실종되어 버렸다.
그가 이곳에서 활동을 하였지만 그의 출생지는 아닌 켈커타공항에 그의 이름을 붙인 것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런데 이 공항을 슈바스 찬드라 보스로 개칭한 것으로 보아 간디와 국민회의가 주도한 인도 독립운동에서 완전히 도외시 당했던 그의 폭력혁명론이 빛을 보고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리튼 호텔의 다양하고 먹음직스런 아침식사를 포기하고 아침 일찍 세익스피어 사라니에 있는 인도정부 지역관광 사무실로 택시를 이용하여 찾아갔다.
8시 출발로 되어 있는데 관광객은 아무도 보이지 않고 사무실 문엔 커다란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7시40분쯤 되니 한 젊은 서양여인이 물병을 들고 카메라를 목에 걸고 조그만 가방을 메고 나타났다. 한 10분쯤 부근을 배회하고 오니 잘 차려입은 인도 여인들이 6명, 말쑥한 신사복 차림의 남자 넷, 청년 한명이 사무실 앞에 모여있다.
35인승 좌석 간격이 넓은 버스는 차례로 좌석을 확인하고 6-7명이 탑승하지 못한 채 켈커타 시내관광을 위해 떠났다.
조수석에 자리잡은 청년 안내원은 창밖의 거리를 구경하는 승객들에게 간간이 중요건물 등을 알려준다.
인도의 國父 간디동상이 서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호치민 상이 엉뜽하게 서 있는 것은 의아했다. 벵골지방이 전통적으로 공산당 세력이 강한 곳이고 공산당 주 정부가 계속하여 집권하고 있어서 일까?
옛날 영국 총독부였고 오늘날은 벵골지사 관저인 라즈바반은 붉은 벽돌에 베이지의 두가지 색으로 조화를 이룬 번듯한 커다란 건물이었다.
아무데나 천막을 치고 사는 사람들이 즐비한 빈민가, 겨울인데도 벌거숭이에 가까운 남루한 옷차림, 먹다 남은 음식 찌거기가 흩어져 있고, 자는 사람이 다 내려가 보이고, 아직 잠에 빠져 있는지 미동도 하지 않는 사람들, 약간씩 꿈틀거리는 사람들, 맨바닥에 노숙하는 사람들도 계속 보인다.
어떻게 이곳을 "기쁨의 도시, 즐거움의 도시"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내세에 구원을 얻기 위한 고행과 구도의 길이라고 할지라도 이는 너무 가혹하지 않는가!
이 불결한 빈민촌의 더러움에 넘쳐 나는 걸인들을 빼놓고는 상상할 수 없는 인도, 극빈생활인데도 우주항공, 원자력, 컴퓨터소프트웨어 등의 분야에서는 세계 최고의 두뇌와 최첨단의 기술을 자랑하는 나라, 현대적인 교통수단인 자동차와 오토바이, 작은 3륜차 위에 지붕을 씌워 놓은 발로 가는 인력거, 릭샤, 스큐터, 소가 끄는 수레들에 얽힌 대혼란 교통지옥, 켈커타 상업지역에서 민파에 떠밀리듯 걸어갔던 경험, 켈커타는 인도의 고질적인 문제덩어리를 모두 안고 있는 듯 보였다.
70년대에 집없는 사람들이 약 10만명에 달한다고 했는데 지금은 그 숫자가 얼마나 늘었을까 줄었을까, 빈민들이 자꾸 도시로 몰려듬에 따라 그 숫자는 아마도 줄지 않았을지 모른다.
큰 거리를 지날 때 '소년 소녀들이 만난다. 그러면 결혼한다.'라는 간판이 걸려 있는데 인도에도 결혼소개소가 있는 모양이다.
버스는 쟈인템플에서 정차하였다.
자이나교는 기원전 5세기에 인도 동부의 마가다 왕국에서 자이나란 존칭을 받은 바르다마나가 세운 종교다. 그래서 이 교를 자이나교라고 하며 무신론적 염세적인 종교이다. 단식을 통해서 죽음에 이르는 것이 가장 성스러운 행동으로 주장되고 있다. 생명을 중시하고 엄격한 살생계를 지키며 희생을 부정한다. 이슬람교도의 침입으로 쇠퇴했느나 오늘날도 상류계급의 상인, 금융업자를 중심으로 일백수십만명의 신도가 있다.
자이나교 사원이 일반적으로 아름다운데 내부의 화려함과 아름다움이 뛰어난 사원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다이아몬드를 수천만개 박아놓은 듯 눈부시다. 사원 내부 벽에 안치된 불은 19세기부터 지금까지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아름다운 내부 장식은 전체적으로 백색이 주류를 이루는데 아마도 白衣派와 관련이 있는 듯 하다. 자이나교도 가운데서 흰 옷을 입는 백의파는 보다 온건하고 융통성이 있는데 반하여, 무소유의 이론에 따라 공의파는 옷을 걸치지 않는 보다 엄격하고 청교도적인 사람들로 구분된다.
간지스강(후글리 강) 위를 연결하는 길고 튼튼해 보이는 하우라 다리 옆으로 큰 규모의 꽃시장, 야채시장이 보인다. 켈커타 최대의 상업지구에서 보석, 유리, 의류, 각종 공산품 등 도매시장의 활기차고 북적거리는 모습을 구경하며 지나갔다.
벨루아 마드 사원은 켈커타시 북쪽 후글리강 기슭의 한 지류를 끼고 광대한 부지 안에 너즌하고 깨끗하게 자리잡고 있는 약간 색다른 건축물로 라마크리슈나교의 대본산이다.
사원 안에는 꽃으로 장식된 케익 모양의 단위에 꽃 목걸이를 세개 목에 걸고 고상하고 의젓한 풍모의 라마크리슈나가 좌정하고 있다. 큰 그릇 두 개에 분홍빛 술같은 액체가 담겨 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조그마한 스푼으로 손바닥에 부어 마시고 있어 물어 보니 라마크리슈나가 목욕 한 물이라고 한다. 이곳엔 정작 라마크리슈나는 살지 않았고 그의 제자 비베카난다가 살았던 곳이다.
라마크리슈나 파라마한사는 벵골 태생으로 가난했지만 정통 브라만계급 출신이었다.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밟지 못했으나 비상한 기억력을 소유했던 그는 어려서부터 종교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었다.
우상을 통해 多神을 숭배해 왔던 전통적 힌두신앙과 새로이 침투해 온 기독교적 종교관 사이의 모순된 견해를 라마크리슈나는 합리화시켜 조정함으로써 인도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종교에 대한 새로운 신뢰감과 자부심을 갖게 하였고 인도의 신흥 지식층으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라마크리슈나가 사망한 후에 제자 비베카난다에 의해 포고단의 활동은 더욱 발전하고 그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진정한 의미에서 포교단의 창설자는 비베카난다였다.
비베카난다는 히말라야산 속에서 6년간 修道를 쌓았으며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티벹까지 방문하기도 하였다. 시카고 세계종교회의(1983)에 힌두교를 대표하여 참석하였다. 그는 베다哲學의 精隨인 베난타에 근거하여 인도정신문화의 우월성과 힌두교의 보편성을 강조하여 청중들의 갈채를 받았었다. 젊은 나이인 40세로 사망할 때까지 스승의 가르침을 더욱 발전시켰으며 쉴새 없이 포교활동을 계속하였다.
켈커타 국립박물관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박물관 중의 하나이다. 지질학, 인류학, 고고학, 동식물, 토속, 미술공예 각 부분으로 나누어져 인도 전역에서 수집한 풍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1층엔 그리스 미술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 미술품과 검은 돌로 된 불상이 가득하고 석가모니 사리를 모셔 놓은 스투파(탑)도 이 곳에 있다.
2층은 자연사박물관으로 공룡세서 각종 동물들짐승, 날짐승까지 실로 엄청난 양의 박래품이 소장되어 있다. 그 밖에도 인도면직물, 모조타지마할, 4000년 전의 관속의 미이라 등 볼만한 것이 많다. 특히 1875년 바루트 지방에서 커닝함에 의해 발굴된 높이 9피트나 되는 4개의 커다란 문, 원주문은 23피트나 되는 유물로 커다란 방에 가득히 놓여 있다.
니코 공원에 내려주었을 때는 이곳이 어린이 대공원이라 모두들 싱겁게 웃고 말았다.

- 1998년 5월 (115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