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특별강좌
인도기행(13)
< 佛陀가 최초로 설법한 사르나드 >
이윤희 (사학21·문학박사·서일전문대 민족문화과 교수)
----- 수많은 사슴들이 뛰놀았다는 부처님 최초의 설법지 鹿野苑에는 오늘날 적막만이 감돌뿐이지만 그 옛날 승려들의 경건한 佛心은 아직도 베어있고.....
불교의 4대 성지는 석가모니가 태어난 룸비니, 깨달음을 얻은 부다가야, 최초로 설법한 사르나드, 입적한 쿠시나가르이다.
나의 인도여행 길은 힌두 제일의 성지 바라나시를 둘러본 후 석가모니가 최초로 설법한 사르나드로 향했다.
불교를 창시한 석가모니의 본명은 고다마 싯다르타로 카필라바스투의 왕자로 태어났다. 그에게는 즐겁고 행복한 궁중생활과 화려한 장래가 약속되어 있었지만 생로병사(生老病死)에 대한 회의가 그로 하여금 현세의 영화를 덧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는 조용한 은둔생활을 하면서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려고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왕위를 계승해야 하는 사명감 때문에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다가 아들 라훌라가 태어나자 드디어 출가를 단행하였다.
당시 지식과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을 학대하면서 금욕생활을 영위해야 하는 승려계급의 수도생활을 석가도 그대로 따랐다. 그는 6년 동안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참을 수 없는 고행을 경험하면서 스승을 찾아 각지를 돌아다니며 여러 학설에 접하였다. 마지막 단계에 이르는 고행까지 경험한 후에 그는 당시 사람들이 믿어온 바의 금욕생활이 구원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좌선을 통해서 구원의 방법을 찾기로 결심하고 부다가야의 우르베라 마을 보리수 나무 아래 앉아 49일 만에 득도(得道)하였다. 세상에서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터득한 그는 곧 5∼6백리 떨어진 사르나드로 향했다.
그곳에서 석가는 함께 수도하다가 그를 타락자로 생각하고 떠나버렸다. 다섯명의 옛 동료 수도자들에게 처음으로 설법하였다. 그들은 며칠 동안의 토론 끝에 석가를 부처로 인정하고 제자가 되었다.
석가모니의 최초의 설법장소로 알려진 사르나드는 바라나시에서 10키로도 채 안되보이는 가까운 교외에 있었다. 그 옛날 그토록 많았다는 승려들은 보이지 않았지만 때묻지 않은 자연과 적막감속에 빛나는 맑은 공기는 그 땅을 밝은 평화속에 감싸듯 하고 신선한 바람은 더위를 식혀주었다.
사르나드의 거리는 더러움과 무질서, 원시적 형태의 생활상, 사람과 자전거와 인력거와 소들로 뒤범벅된 풍경이었다. 그들이 성우(聖牛)로 대접하는 소들의 배설물에 운동화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는 아주 조심스럽게 걸어야 했다.
티벳의 정신적인 지도자 달라이라마가 사르나드를 방문했을 때 온 거리가 인파로 뒤덮혔다는데 그만큼 사르나드는 불교성지로서의 명맥을 강하게 유지하고 있는 듯 보였다. 이곳에서는 다른 지역에서 거의 보기 힘든 스투파(탑)들이 쉽게 눈에 띠고, 시바 신의 아내 시다가 음식을 만드는 곳, 석가모니가 다섯명의 제자를 얻은 것을 기념한 탑, 티벳 사원에서 보리수 나무도 볼 수 있었다.
사르나드에는 유난히 절이 많았는데 일본 절은 대체로 깨끗하고 정교한 인상을 주었고 티벳 절은 동으로 만든 미니불상을 수천개씩 유리 진열장에 가지런히 진열시켜 두고 있는 특징도 있었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한국 절은 보이지 않았다.
부처가 처음으로 법륜(法輪)을 굴렸다는 설법(說法)의 성지인 녹야원(鹿野苑)은 15만 평에 이르는 넓은 유적지 였다. 불교 최초의 승가(僧伽)가 이곳에 세워졌고 수많은 승려들이 불도(佛道)를 닦았고 또 여기는 수많은 사슴들이 노닐었다는 녹야원이지만 지금은 승려도 사슴도 보이지 않고 적막감이 감돌고 있었다. 이 유적지에는 잔해로 남겨진 산재한 주춧돌들이 융성했던 옛 불교의 발자취를 말해주고 있을 뿐......
초전법륜탑(初轉法輪塔)이 세워진 주변엔 고운 잔디가 곱게 깔려있고 가로수처럼 세워진 수목 사이를 걸어 들어가면 법륜탑에 이르게 된다. 아늑하고 고요하기 이를데 없는 녹야원은 한결 공기가 맑고 신선하여 성인의 숨결이 느껴지는 성지에 들어온 분위기 였다. 그곳엔 영원히 흐르는 법륜과 함께 현대 물질문명에서는 찾기 힘든 성스러운 정신문명이 흐르고 있었다.
중국의 현장법사와 우리의 혜초스님이 녹야원으로 불렀던 이곳엔 전설의 붉은 아말타스 꽃이 피어있었다. 석가모니 생전에 이 녹야원의 오두막에 살고 있을 때 바라나시에는 이질적인 면에서 그의 성가(聖價)가 부처님과 맞겨루는 미모로 이름난 매춘부 아무라가 있었다.
아무라가 한번은 부처님을 찾아가 "나의 미모가 어떻게 나를 위해 뭣인가 더 크게 작용할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그 말은 그녀의 미모가 어떻게 부처님을 타락시킬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라는 육체의 무상(無常)을 설득받고 비구니가 된다. 이 녹야원의 유적 가운데 아무라가 앉아 부처님을 유혹했다는 유지(遺趾)에 만이 붉은 아말타스 꽃이 옛 일을 후세에 알리려는 듯 산화(散花)되어 있었다. 안내원의 말에 의하면 아무라 좌에 치성하면 아무라처럼 예뻐지고 관능적으로 된다하여 밤만 지나면 꽃이 소복이 쌓인다고 한다.
바로 이 녹야원이 석가모니가 35세에 최초로 설법을 시작하여 그의 생애 80년 동안의 45년 간을 불교의 전파에 바친 시발지로구나.....
이곳에서 발아한 불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되어갔던 과정을 떠올리면서 이곳저곳 거닐었다.
석가가 힌두 성지인 바라나시에 인접한 사르나드에서 처음 설법하고 불교의 교단인 승가를 조직하여 활동했던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가 사르나드를 포교의 거점으로 삼았던 것은 아마도 인도 각지로부터 이웃 힌두 성지 바라나시로 몰려드는 힌두 교도들을 의식하고 그들에게 불법을 전파하겠다는 의도가 다분히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어떻게 사는 것이 보다 값있는 삶인가?
- 1998년 4월 (114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