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특별강좌
인도기행(7)
< 人力의 한계를 뛰어넘은 걸작품 엘로라 석굴 >
이윤희 (사학21·문학박사·서일전문대교수)
----- 엘로라의 장엄한 유적 불교. 힌두교. 자이나교 석굴사원에서 그 옛날 구도자(求道者)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을 때 데칸고원에서 불어오는 해질녁 산들바람이 나그네의 지친 몸을 식혀주고....
서부 인도 마하라슈트라州의 중앙 아우랑가바드市로부터 북동쪽으로 18마일 지점에 있는 엘로라 석굴을 구경하기 위해 아잔타에서 엘로라로 향했다.
마하라슈트라는 아주 독특한 문화적인 고향이다. 그 오랜 예술적인 전통은 아잔타·엘로라에서 발견된 옛 석굴미술, 훌륭한 건축물, 예로부터 전해오는 음악, 또 그들의 훌륭한 마라타어 문학작품 등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그 유적지로 가는 길은 유난히 구불구불하였다. 산은 볼 수 없고 약간의 구릉지대가 보일 뿐인 평원은 멀리서 보면 작은 산처럼 보이는데, 가까이 지날 때 보면 깍아놓은 언덕배기와 같은 형태다.
나는 아잔타와 엘로라를 보기 위해 아우랑가바드 일대를 몇 시간에 걸쳐 달리면서 인도는 천혜의 무한개발 가능한 자연농원을 보유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거리는 멀지만 아우랑가바드 시내를 거치지 않고 우회도로로 빠지는지 생각보다 빠르게 도착했다.
엘로라 마을에 이르자 굽타시대(A.D 320-647)의 바위를 깍아만든 장엄한 사원들의 일부가 나타났다.
평화로운 분위기이지만 이 돌로 만들어진 기념비들은 먼지가 자욱한 풍경 속에 놓여 있었다. 핑크 빛 황혼이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아아치와 무덤과 사원을 비추고 해질녁의 산들바람이 이글거리는 석굴 구조물로부터 발산되는 열기의 파고를 식혀주고 있었다.
년대적으로 말하면, 엘로라는 아잔타 석굴이 끝난 후에 시작된다. 엘로라 석굴이 만들어질 때 불교는 인도에서 점차 쇠퇴해 가고 있었다. 8미터 높이의 탑을 배경으로 앉아있는 부처상이 눈길을 끈다. 초기의 석굴들은 불교 석굴로 모두 12개이다. 그러나 나중에 훨씬 큰 석굴들은 힌두와 자이나교의 석굴로 힌두 석굴이 17개, 자이나교 석굴이 3개로 구별된다.
이 사원들 앞으로 광대한 평야가 내려다 보이고, 장엄한 유적은 바위절벽을 깎아만든 것으로서 세 개의 종교 즉 불교·힌두교·자이나교 석굴사원이다. 비슈바칼마는 불교석굴이고, 카일라사는 힌두사원이고, 인디라사바는 자이나교사원 등이 대표되고 있다.
비슈바칼마는 불교 승려들에게 성스러운 장소를 마련해 주기 위해 아주 견고한 바위를 파서 만든 것이다. 이 석굴은 앉아 있는 부처와 그것에 이중으로 만들어진 구조물은 난장이들이 춤을 추면서 음악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석굴 가운데는 엄청나게 거대한 것이 있어서 몇 백명이 앉아 쉴 수 있는 규모다. 더위에 지쳐있는 관광객들이 수십명씩 몇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한가롭게 안내인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원래 석굴이란 더위를 피해 수도하는 승려들의 도량(道場)이고 보면 무심히 석굴 안의 그늘에서 쉬고 있는 여행자들의 모습에서 그 옛날 구도자(求道者)들의 모습을 느끼게 한다.
라메스바라 석굴은 강의 여신들을 그 입구에 조각해 놓고 있다. 두마레나 석굴은 시바 신(神)을 위한 사당으로 봄베이 부근의 엘레판타 석굴에 있는 거대한 석굴 사당을 닮고 있었다.
자이나교에 속하는 석굴 32호는 천정에 연꽃을 조각해 놓고 또 망고나무 아래 사자 위에 앉아 있는 신을 묘사해 놓은 이중구조로 되어 있는 석굴로 천정은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어 그야말로 아름다운 사당이었다.
이 기념비 가운데 가장 경탄할 만한 것은 바위 하나로 된 카일라사 사원으로 50미터 길이에 29미터 높이를 가지고 있다. 이 거대한 사원을 어떻게 단 몇 십년만에 이룰 수 있겠는가!
찰루키아 왕조에서 시작되어 이 왕조를 무너뜨린 라스트라쿠타 왕조 때까지 이어졌는데, 라스트라쿠타 왕조의 제2대 왕인 크리슈나 1세는 특히 카일라사 사원을 만드는데 가장 큰 후원을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힌두교의 폭풍과 빛과 파괴의 신 시바에게 바친 이 거대한 사원은 건축된 사원이 아니라 자연 그데로의 바위를 떨어내어 조각을 한 것이다. 이 사원의 측면도는 히말라야에 있는 시바의 고향 카일라사 산의 실제 모양을 본뜨려고 했던 것 같이 보인다. 위로부터 보면 이 사원은 전차를 닮고 있다.
사원과 또 시바의 황소를 위한사당, 또 화랑들을 포함한 전체의 경내는 하나의 거대한 바위산으로부터 직접 깎아서 만들어져 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엄청난 양의 노동력이 그와 같은 한통으로 된 기념물을 창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바위산에서 이 복잡한 전체 건축물을 쪼아 만드는 것이 오히려 다른 곳으로부터 이곳으로 옮겨오는 것 보다는 비용이 덜 들었을 것 같기도 하다.
상상을 초월한 노동력에 의해 이 놀라운 기념비는 만들어졌다. 최고의 숙련공들이 맨 위에서 시작해서 세 개의 도랑을 바위속으로 깎아 들어갔고 이 고립된 돌덩어리에다 아주 자연스럽게 서있는 사원 모양을 만들었다. 여기에다 거대한 시바 상징물, 원주, 실제 모양의 코끼리 모양등이 사원 안에 혹은 밖에 만들어져 있다. 중심사원 주위에는 수많은 남신·여신들이 조각되어 있다.
힌두신 시바에게 바치는 이 사원은 라스트라쿠타 지배 때인 8세기에 세워졌다. 시바의 남성을 위한 사당이기도 한 이 사원은 전 구조물을 하나의 바윗돌로 만들었고 완성하는데 백년 이상 걸렸다고 한다.
인도 고전 쁘라나에 나오는 내용, 사건 등을 묘사하고 있다. 평화롭게 앉아 있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하는 시바, 갠지스 강을 손으로 끌어 올리는 시바, 파르비티 여신과 결혼하는 시바...... 이 사원은 힌두 신들과 신화적인 인물들을 아주 예외적으로 강렬하게 조각해 놓았는데 노골적이고 관능적인 성적 묘사를 해놓아 보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였으니 이 부분은 풍부한 상상력에 맡겨 버리겠다.
엘로라는 해마다 수많은 관광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힌두 석굴이 동적이고 극적이라면 바로 옆에 자리잡고 있는 불교 석굴은 정적이고 명상적이다. 마지막 힌두 석굴로부터 몇 백미터 떨어져 있는 자이나교 석굴들은 엘로라의 마지막 단계를 장식해 주고 있다. 그것들은 A.D 800년에서 1000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수 백년 동안 숨어있던 아잔타와 엘로라 석굴이 알려지면서 석굴과 교역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초기 석굴 승원은 고대 무역로 특히 항구와 내륙의 중요한 도시를 연결하는 길목을 따라 위치해 있었다. 실제로 서부 데칸의 보다 덜 알려진 상업로였던 것들은 이 석굴 위치를 따라 감으로써 추적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종교적이고 지리적인 연계 뒤에 숨어있는 관념은 석굴이 더위를 피하기 위한 승려들의 수도 장소라는 것 이외에 지나가는 여행객과 상인들을 위한 휴식처로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들 석굴은 지배자들이 후원했는데, 그들의 그 지배와 번영은 주로 외국무역, 대개는 지중해까지 이르는 육·해상 무역에 의존해 있었다.
무역로는 초기 불교 성소의 후원자였던 사따바하나 왕조의 지배자에게는 커다란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어떤 석굴의 벽에 새겨진 비명은 헌금자의 이름, 도시 및 재산 등을 기록하고 있다. 예컨대 나나가트 석굴은 만천마리의 소와 무려 천마리의 말이 단 한 번의 제사의식을 위해 사따바하나 지배자가 바치고 있는 것을 기록해 놓고 있었다.
사따바하나 왕실과 같은 헌금자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불교도가 아니라 실제로는 힌두교의 추종자들로서 힌두교 및 엄격한 브라만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불교가 브라만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믿음이 무엇이던 간에 종교적 건조물을 위해 자선적인 헌금을 하는 것은 헌금자와 그의 가족에게 정신적 구원을 가져다 주는 복이 된다고 믿어왔었다. 아마도 상업적 교통로를 따라서 석굴을 만들므로써 한꺼번에 두 가지 목표, 물질적·정신적 목표를 달성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무역로는 승려들에게 더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포교하기 위해서 가끔 여행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만들어진 도로망은 그들에게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포시(布施)와 일상의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는 마을을 따라 그 길을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내가 아잔타와 엘로라를 보기 위해 찾아간 그 길도 그 중 하나 이리라.
어느 철학자가 언젠가 "어떤 돌들은 당신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하는데 대해서 더 많은 것을 돌이 말 해줄 수 있다." 고 말한 것을 아잔타와 엘로라는 되새겨 보게 하였다.
- 1997년 6월 (106호) 게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