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특별강좌
인도기행(6)
< 세계적인 석굴미술의 꽃 아잔타 >
이윤희 (사학21 문학박사, 서일전문대교수)
----- 아잔타 석굴 벽화의 화려한 배경에는 순간의 고통이 더 이상 인생 자체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 예술로 승화되어 있고....
힘겹게 구한 항공권으로 어제밤 봄베이에서 아우랑가바드에 올 수 있었다. 별 다섯개의 관광호텔인 라마인터내셔날은 내가 지금까지 외국여행에서 이용한 가장 고급스런 호텔이었다. 비교적 한적한 도시인데다 비수기 이고 보니 80불 정도로 일박할 수 있었다. 고급호텔이라 망설이면서도 단 하루 머문다는 마음에서 투숙했으나 어느 고급스런 만찬 못지 않은 풍성한 뷔페식의 아침식사가 포함된 것을 보고 이 호텔에 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보기위해 택시를 예약했다.
전형적인 인도 농촌 길을 택시는 숨가쁘게 달려 주었지만 속도계의 표시는 70키로를 넘지 못했다. 데칸 고원이 시작되는 지대라 봄베이 보다는 기온이 낮은 듯 하였다. 시골 길 인데도길은 널직한 2차선에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었다. 기복이 심하지 않는 고원지대가 광대하게 펼쳐진 이곳엔 간혹 경작지가 보이고 대부분 손 닿지 않는 채로 잠들어 있는 듯 고요한 대지의 모습 그대로 였다.
메마른 땅처럼 보이는 데도 뒤집어 놓은 흙은 기름져 보였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농작물들이 풍성하게 자라고 특히 해바라기, 바나나, 사탕수수가 많이 경작되고 있었다. 방대한 제당공장이 아잔타와 아우랑가바드 중간지점에 세어져 있고 사탕수수로 엮어 만든 움집에서 사람들이 살고 있어 문명 이전의 시대로 돌아가 내가 그곳에 놓여진 느낌이었다.
어렸을 때는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전국 어느 곳에서도 거의 볼 수 없는 목화를 보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인도인이 세계 최초의 목화재배인이고 또 세계 최대의 면직물 산업을 발달시켰던 점과 관련시켜보면 당연한 것이리라.
아잔타 마을에 접근하자 지금까지 산이라곤 보이지 않았는데 그 지대에만 산이 있고 유적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가 드러나 있는 아잔타 석굴 전체의 규모를 한눈에 보면서 의구심이 일었다. 왜 이처럼 큰 유적지가 몇백년 동안 알려지지 않고 숨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이곳은 사람의 왕래가 없었던 지역으로 볼 수밖에 없지 않는가.
아라비아 해(海)로 부터 인도 내륙으로 약 50키로미터 지점에서 시작된 데칸고원의 출발점인 이 산들은 대략 1300미터 높이에 고원을 형성하고 있으며 아잔타는 바위 협복에 숨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아잔타 석굴은 몇세기 동안 망각 속에 묻혀 있었다. 이 석굴이 발견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1819년 동물을 사냥하던 한 영국군 장교가 갑자기 푸른 초목으로 뒤덮힌 깊은 골짜기에 뛰어 들었다. 숨을 죽일만한 아름다운 석굴이 그의 눈앞에 번쩍 나타났다. 그는 거의 수직형의 협곡 담벽에서 여러개의 석굴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것이 아잔타 석굴이었다.
아잔타 석굴은 800년에 걸친 영광스런 과거의 이야기를 전해주기 위해 샤바디리언덕에서 수백년 동안을 고요히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샤바디리 산록에 위치한 이 지점은 일년의 대부분이 잠시 초록색으로 물들게 하는 짧은 장마철을 제외하고는 단조로운 다갈색 풍경이다. 외롭게 숨어있는 듯한 이 협곡의 석굴 승원을 처음 발견했을 때 정말로 매혹적인 광경이었을 것이다.
약 2천년 전부터 수백 년에 걸쳐 거대한 석굴을 파는 힘든 작업을 계속했고 독경의 랑랑한 목소리가 끌과 망치소리와 어우러져 언덕과 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이 주위가 석굴로 만들어져 있는 것은 바위로 깎아 만든 광범한 성원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것들이 인도의 물질적, 정신적 문화의 가시적인 기록이 되었으며 이는 또한 국제적인 문화유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 석굴은 경건한 수도 장일 뿐만 아니라 때로는 야만인, 도둑, 동물들의 거처이기도 했는데 이들 인간이 만든 석굴이 인도 예술의 가장 섬세하고 심오한 문화 유적에 끼여드는 것이다. 바위를 깍아만든 이 성스러운 것은 거대한 예불의 장소가 되었다.
석굴들이 왜 인도와 대륙의 이 지점에 몰려 있는지는 그 이유가 분명치 않다. 데칸고원과 그 주변에 바위를 깎아 만든 석굴이 몰려있다. 예술인들은 단순한 도구 어쩌면 끌 이상의 도구를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각의 책임을 맡은 승려들은 기념비들의 종교적 특성을 강조하는 일 정도를 감독했을 뿐 기술적이고 예술적인 것은 직업적인 석공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석굴의 건축은, 신앙이 고립적인 금욕주의 태도에서 승원 조직체로 구성되어 가는 발전을 가르킨 것으로 보여졌다. 넓게 말하면 불교석굴들은 두 부분으로 구분될 수 있는데 즉 여러 사람이 모여서 예배하는 홀과 다른 하나는 승려를 위한 숙소로 구분되어 있었다.
아잔타 석굴은 불교 승려들에게 속세를 떠나 은둔처를 제공해 주기 위해 건축되었다. 승려들을 그곳에서 살고 가르치고 의식을 행하는 배움의 자리였다. 헌신적인 신앙심에 감화를 받아 승려들이 망치나 끌 같은 것으로 각기 부처상을 조각했다. 아잔타는 고대 인도의 궁중생활, 문화 및 일상 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아잔타 석굴 속에 깊숙이 들어간 나는 왜 이 석굴이 부처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들로 전해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수많은 부처상에서 요정, 공주, 다양한 인물에까지 아잔타 석굴은 필적할 수 없는 예술품이었다. 제 1석굴에 목욕하는 부처, 싯타르타 왕자가 궁정을 출가하는 그림, 두 명의 공주, 제 2석굴의 여러 모양의 여인들, 16석굴의 설법하는 부처상, 17석굴의 왕자들이 코끼리를 타고 행진하는 그림, 화장하고 있는 여인등...
아잔타 16석굴에는 등으로 천정을 받치고 있는 조각상들이 유난히 많고 한결같이 찡그리고 고통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런데 한군데 두사람이 등으로 천정을 받치고 있으면서도 표정만은 웃고 있는 조각상이 있어서 이채로웠다.
부처가 태어난 과정을 그림으로 재현해 놓고 있었는데 부처의 아버지 수또다나, 어머니 마야, 부인 야소디라, 아들 라훌라가 그 그림 속에 모두 그려져 있었다.
17석굴에는 아잔타와 인도에서 가장 유명한 걸작품 그림이 있다. 부처가 아내와 아들 앞에서 탁발하는 모습의 그림이다. 탁발승의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 야소디라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또 이 석굴에는 다라나시 공주가 공주 목걸이를 목에 걸고 있는 유명한 그림이 눈길을 끌었다.
아잔타 29개 석굴은 80미터 높이의 견고한 계곡의 암벽에 600여년의 세월 동안에 걸쳐 조각을 해놓은 것이다.
아잔타는 불교의 초기미술과 그 상징을 강조했던 때부터 분명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아잔타 벽화의 화려한 배경에서는 보살이 세계의 왕자로서 화려하게 묘사되어 있다. 순간의 고통이 더 이상 인생 자체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 예술로 승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가 망각 된 것은 아니고 그 목표의 완벽에 도달하는 것은 내적인 외적인 생활이 분리 될 수 없는 속에서 이룩되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었다. 얼굴 표정에서도 감정, 기쁨등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인생 그 자체를 형상화시켜 전달하려 했던게 아닐까?
아잔타 29개 석굴에는 건축, 조각 및 회화가 집약되어 있다. 아잔타 석굴의 벽화와 천정화는 인도 미술의 극치를 나타낸 것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아잔타 석굴은 사실상 불교 미술만 구성되어 있으며 불상, 석가의 생애, 불교의 정토(淨土)세계 뿐만 아니라 인도 사람들의 생화풍속을 잘 묘사해 놓고 있다. 특히 모자(母子) 그림은 세계의 벽화 가운데서 으뜸으로 꼽히고 있다. 아잔타 미술은 조그마한 진주와 꽃에 이르기까지 고도의 솜씨로 다듬어졌으며 색채를 훌륭하게 배함하였다. 아잔타 화풍은 서부 인도의 미술과 페르시아 미술과의 훌륭한 융합을 보여주고 있다.
5세기 경에 이 유적은 완전히 망각되어 버리고 망치와 끌의 소리가 새의 지저귐과 원숭이들의 장단 소리로 대체되고 말았던 것이다.
아잔타 제 26석굴 입구에는 이러한 말이 새겨져 있다. "산위에 해와 달이 반짝이는 것만큼 오래 견딜 기념비를 세우노라" 고
- 1997년 5월 (105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