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특별강좌
인도기행(5)
< 힘겹게 구할 수 있었던 아우랑가바드행 항공권 >
이윤희 (사학21회, 문학박사, 서일전문대 교수)
------- 모기가 윙윙거리는 프로펠라 비행기는 데칸고원(高原)을 넘어 석굴미술의 보고(寶庫)로 나를 안내하고......
나는 약 2시간 비행으로 뉴델리에서 봄베이까지 왔다. 봄베이 공항에 내리니 여름날씨와 같은 후끈한 더위가 덥쳐왔다. 델리에서는 한겨울의 1월말이고 보니 아침 저녁으로는 우리 나라의 3월말 기온쯤 되어 쌀쌀하게 느껴졌는데 약 3000리쯤 내려왔을까? 봄베이에 오니 분명한 여름 날씨다. 호텔 방에서도 냉방기구를 사용했다.
호텔에서 아우랑가바드 가는 비행기편을 알아보았다. 일요일이라 여행사는 닫혀있고 호텔에서만 확인 가능한데 인도 미술에 관심을 갖는 외국인이 많아서인지 항공권을 구할 수 없었다.
아우랑가바드는 봄베이에서 북쪽으로 대략 30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으로 생각되는 북쪽에 위치해 있으므로 델리에서 봄베이로 오는 도중에 들려 볼 생각으로 항공권을 사려고 뉴델리에서 시도해 보았지만 불가능했었다.
봄베이에서는 아무랑가바드가 델리에서 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으므로 어떻게 쉽게 갈 수 있겠지 하고 가볍게 생각했었는데 역시 여기서도 낭패다. 서울의 S교수 부부가 봄베이까지 와서 아우랑가바드를 가지 못하고 대신 고아를 구경하고 델리로 돌아갔다는 경험담이 충분히 납득되었다.
여행자들이 인도를 여행하기는 하지만 인도의 아우랑가바드에 있는 아잔타와 엘로라 석굴을 찾아가 보는 사람은 많지 않는 이유가 지리적 조건, 항공편이 불편한데도 원인이 있었다.
골든 메노르 호텔을 나와 부근의 좀더 크고 고급스러운 할리데이 인 호텔로 가서 다시 알아보았지만 여행사의 답변은 마찬가지 였다.
택시로 가볼까 하여 알아보았더니 비행기 요금보다 더 비싸게 요구하고 그보다는 위험부담과 시간낭비가 많아 포기하고 다시 골든 메노르로 돌아왔다.
카운터에 앉아있는 아가씨를 제쳐두고 메니저 사무실로 들어가 문의하면서 나는 아잔타와 엘로라를 구경하고 싶어 멀리 한국에서 이곳에 온 것이라고 말하였다. 사장과 메니저가 아우랑가바드행 항공권을 구하기 위해 번갈아가며 여러군데 전화하여 알아보았지만 결국 구하지 못하였다. 그러고선 마지막 방법은 공항으로 직접 나가 알아보는 길 뿐이라며 호텔의 미니버스를 내어 주었다.
이스트웨스트 에어라인에 도착하여 여사무원에게 아우랑가바드행 항공권을 물었더니 5일 이후의 비행기편이나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봄베이에 여러날 머무를 여유가 없어 귀국해야 하므로 비행기표를 얻는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었다. 불가능한 일이지만 책임자가 미쓰 만주이므로 그녀에게 문의해 보라는 것이었다.
그녀의 사무실로 찾아갔더니 승객의 탑승절차를 돌보고 있는 카운터에 나가 있다는 것이다. 30분쯤 기다리니 그녀가 돌아왔는데 미쓰로 표현하는걸 보니 미혼인것 같지만 나이는 들어보이는 데다가 가끔 볼 수 있는 인도여성 특유의 비만형 체질이었다. 항공권에 관해서 말을 했더니 여러가지 이유를 나열하는 것으로 보아 나는 직감상 티켓을 구하는 것은 힘들겠다고 느껴졌다.
만주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옆에서 듣고 있던 허름한 옷차림을 한 사람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상하게도 그 사람이 말을 건네오자 만주는 묵묵히 앉아 있더니 볼일이 있는지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 남자는 아우랑가바드를 그렇게 절실히 가야하는 이유를 자세히 물었다.
그때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면서 만주를 기다리라고 했었던 여사무원이 나를 보면서 이 사람에게 잘 부탁해 보라는 눈짓을 보냈다. 나는 이 사람의 옷차림은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이지만 만주의 사무실에 들어와 당당히 자리잡고 있는 모습이나 또 만주가 조심스럽게 방을 나간 것으로 보아 어쩌면 이 사람은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나는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는데 인도 문화에서 아잔타·엘로라 미술은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인도 미술 특히 불교 미술은 대단히 높은 경지에 이르렀던게 사실이지만 이민족의 침입과정에서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대부분 파괴되어 버렸다. 그러나 다행히도 석굴 미술은 잘 보존되어 오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아잔타와 엘로라의 유적이다. 학생들에게 생생하게 가르치려면 직접 보아야 되지 않겠느냐고 다소 과장적인 표현으로 대답했다.
그는 자기도 한국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고 있다. 일본에서 근무한 일이 있는데 부산까지는 다녀간 일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컴퓨터 앞으로 가더니 이름을 묻고 직접 아우랑가바드 탑승자 명단에 입력을 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날 밤에 봄베이로 돌아오는 왕복권까지 명단에 넣어 주었다. 그러면서 사무원에게 요금만 지불하면 항공권이 지급될 것이라며 바쁘다면서 윗층 사무실로 올라갔다. 만일 내일 저녁 탑승할 때 문제가 있으면 자기에게 연락해 달라며 와이셔츠 주머니에서 명함을 내어주었다. 이 항공사의 커머셜 메니저이고 이름은 라마챤드란 이었다. 뜻밖에 이 남자의 도움으로 세계적인 석굴 미술의 보고(寶庫) 아잔타와 엘로라를 계획데로 찾아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인도 여행을 하다보면 순박한 인도인들의 국민성을 여기저기서 느낄 수 있다. 한편으로 여행중 뜻하지 않는 어려움에 직면할 경우 높은 직위의 사람에게 부탁했을 때 의외로 빨리 해결되는 경우를 경험하였다. 이것은 식민지 지배를 오래 받은 결과로 관료근성이 강하게 뿌리 박혀 있는 현상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몇년전 영국에서도 인도 들어가는 비자를 받을 때 비슷한 경험을 했다. 인도 대사관은 비자를 받기위한 사람들로 넓은 인디아 하우스에 적어도 500명 이상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정리를 맡고 있는 인도인에게 물었더니 비자를 받는데 적어도 일주일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교수 신분을 밝히면서 비자 담당 부영사를 만나게 해 달라는 명함을 내밀었다. 영국과 인도 사회에서는 교수를 아주 높이 대접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단히 민첩하게 생긴 젊은 외교관은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나는 급히 인도 입국사증을 받아야 한다는 요구사항을 말하였다. 일주일을 기다려야 하는 비자를 1시간만에 만들어 주어 받은 일이 있었다.
저녁 7시30분 아우랑가바드행 44인승 비행기에 탑승했다. 왜 아우랑가바드 가는 비행기편이 쉽지 않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인도 역사와 인도 미술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아잔타와 엘로라를 보고싶어 하지만 하루에 한번 가는 비행기가 겨우 프로펠라 달린 미니 비행기고 그나마 결항하는 경우가 잦다는 것이다.
승객의 대부분은 서양인들이고 인도인들은 몇 명에 불과했다. 비행기 안은 후덥지근 한데다 파리만큼 큰 모기들이 윙윙거리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비행기가 공중에 떠 있는 시각은 정확히 30분이지만 제법 훌륭한 식사가 나왔다. 내가 10여년전 제주도 한번 갈 때 약 1시간 비행인데도 기껏 사탕 몇 개나 주고 끝내 버린것과 비교한다면 달달거리는 비행기지만 인도 비행기는 서비스가 좋았다. 하기야 다 준비된 음식 10분이면 먹을 수 있는게 아닌가.
어둠이 깔리는 지상은 희미한 윤곽만이 멀리 나타날 뿐 생각했던 만큼 산은 없는 듯이 보인다.
데칸고원의 산악 지방에 들어서면 몇시간이고 아슬아슬한 비탈길을 달리게 된다. 기차로 달리다 보면 견고한 암석을 깎아낸 터널을 지났는가 하면 다시 터널이 나타나는 가파른 산들이 중첩되어 있는 곳이다.
데칸고원은 인도 중부에 위치하여 인도아대륙을 남북으로 단절시키고 있다. 칼카타에서 뉴델리를 거쳐가는 북부인도 지역이 위도상으로 볼때는 꽤 높은 곳이지만 살인적인 무더위가 몰아치는것은 북쪽으로 세계의 지붕인 히말라야 산맥과 남쪽으로 데칸고원 사이의 중간에 끼어 있는 커다란 분지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데칸고원이 거의 끝나가는 해변에 가까운 곳을 날고 있으니 험준한 산맥을 별로 느끼지 못하고 넘게 되는 것이다.
- 104호(1997년 4월)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