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기행(3)


동문특별강좌 인도기행(3)

작성일 2005-02-18

< 인도에서 가장 서구화된 상공업 도시 봄베이 >

 이윤희 (사학21회, 문학박사, 서일전문대교수)

--- 예로부터 유럽 및 서남아시아의 통상 거점인 이 항도에는 세계 제일이었던 면직물 공업의 옛 영광이 아직도 살아 움직이고......

 아침에 호텔 레스토랑에서 주문한 오렌지 쥬스 맛은 일품이었다. 오렌지로 즙을 내어 가져온 신선하면서도 진한 그 맛에 몇번이고 감탄하면서 한잔 더 주문하여 식사로 대신했다.
 이른 시각에 택시로 봄베이 시내 관광에 나섰다.
 나이지긋한 택시기사는 인도에서 켈커타가 인구가 가장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최근에는 봄베이 인구가 켈커타를 앞질렀다고 하면서 길게 봄베이를 관통하는 전철은 1분 간격으로 운행하지만 언제나 사람들이 북적거린다고 알려주었다.
 봄베이 시가지는 델리보다 한결 정돈되고 번창해 보였다. 7∼8층 고층 건물이 즐비한 사이사이로 건물 높이 만큼 키 큰 야자수가 쭉쭉 뻗어 올라가다 꼭대기 쯤에서 시원스레 뻗쳐내린 나무잎들은 이국적인 정취를 느끼게 했다.
 지름이 사람키보다 훨씬 큰 파이프가 아주 길게 이어져 있어 무엇인가 물었더니 수도관이라고 한다. 봄베이 언어는 원래 마라타어인데 힌디·영어와 함께 세가지 언어가 함께 통용되고 있다. 민간용어로는 마라타어, 상업용어로는 영어가 사용되고 있다.
 알맞은 속도로 달려주는 차안에서 봄베이 거리를 구경하고 있는데 서구화된 첨단 모습의 도시와는 대조적인 광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곳이 봄베이에서 제일 큰 빈민촌 다라위였다. 이 빈민가는 쓰레기 조각과 비닐로 엮은 지붕으로 지어진 비참한 누더기 천막으로 4K이상 이어지고 있었다.
 이 슬럼가를 철거하는 일이 봄베이 건설의 제일 큰 문제인데 빈민들이 떠나지 않아 시당국이 골치를 앓고 있다고 한다. 빈민가의 도로폭을 넓히는 공사가 일부 진행되고 있었는데 도로도 확장되고 빈민가도 그만큼 철거되는 이중의 효과를 계산하는 정책인 듯 보여졌다.
 빈민촌 다라위가 끝나면서부터 봄베이에서 가장 큰 농수산물시장 라다르가 들어서 있었다. 봄베이는 역 주변에 대부분 시장이 다 서는데 그 중 라다르가 제일 크고 밖에서 모두 이곳으로 농산물이 집결된다. 실제로 많은 양의 갖가지 농산물이 거래되고 있었다.
 빈민가 다음으로 면직물 공장이 5K정도 이어져 있었다.
 인도의 첫 면방직 공장은 1854년 다바르에 의해 봄베이에 창설된다. 이 면방직 공업은 외국의 방적 공장뿐만 아니라 인도의 토착 실잣는 사람들과도 경쟁하여야 했다. 처음의 공장들은 실 잣는 공장이었지 베 짜는 공장은 아니었다. 1870년대에 새로운 공장이 많이 설립되었으며 면방직 공업이 봄베이 이외의 다른 지방으로 확대되어 갔다. 미국의 남북전쟁이 면직물의 수출에 눈을 돌릴 수 없게 만들자 인도의 면직물 공업은 호기를 맞게 되었다. 인도에서 실제적인 면직공업의 발전은 1880년대 후반 조로아스터교도로서 인도의 대표적인 기업가인 잠세드 타타가 나그뿌르와 봄베이에 <여왕폐하의 공장>을 창설하면서 비롯되었다. 인도의 면직 공업은 옛날의 영광을 되찾아 영국의 직물 공업과 겨룰 만큼 착실히 성장해 나갔다.
 잠세드 타타는 통찰력을 지닌 기업가이면서 무모한 모험가였다. 남북전쟁 당시 미국에 원면(原綿)을 수출하여 거액을 벌었으며, 에티오피아 전쟁 때는 출정한 영령인도 군에게 군수품을 공급하여 큰 이익을 보았다. 이 이익금으로 그는 면방직 공장을 건설하였으며 나중에 면직물 공업에서 철강 공업으로 전환하였다. 섬유에서 강철로의 전환은 매우 예외적인 경우였다. 1907년 생산에 들어가기 전에 잠세드 타타는 사망했지만 그가 추진했던 타타 철강회사는 세계 굴지의 강철 생산업체로 성장하였다. 1930년 대에 가면 이 공장은 연간 1백만 톤을 생산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제철 공장이 되었으며 인도는 철 생산 국가들의 순위에 있어서 여섯번째에 들게 되었다.
 타타가 강철 공장을 설립하였을 때 불과 몇 주일만에 엄청난 자금을 조달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회사 설립에 투자한 주주가 8천명에 이르렀으며 다수가 봄베이의 자본가들이었다. 토후도 15명이나 참여하였는데 그들이 투자한 3백만 루피는 타타 가족 4명의 출자액과 맞먹는 액수였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주의해서 보아야 할 부분이 있다.
 타타는 엄청난 자본금을 조달하면서 애국심을 발휘할 수 있는 적절한 기회를 포착한다. 이때는 벵골 불리 조치에 대한 반발로 스와데시(국산품 애용)운동이 일어나 인도인들이 영국 상품을 배척하고 나섰으며 타타는 민족 감정에 호소하여 표면적인 반영운동(反英運動)이 아닌 숨은 애국심을 보이도록 토후를 비롯한 민족자본가들에게 기회를 부여했던 것이다. 타타 철강회사는 전적으로 인도의 민족자본으로 세워진 인도의 기업과 기술의 기념비였다. 현재도 타타그룹은 철강·자동차 공업을 비롯하여 인도 제일의 세계적 기업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택시 기사는 인도 최대의 빨래공장이 있는 곳이라며 내려서 잠시 구경하도록 배려해 주었다. 도로에서 내려다보이는 빨래공장은 엄청나게 넓게 자리잡고 있었다.
 빨래공장이라고 하지만 세탁기계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반질반질한 시멘트 바닥만이 보일 뿐이다. 아마도 비누를 사용하지도 않은것 같으면서 옷을 물 속에 넣었다가 한쪽을 잡고 마치 우리나라 농촌의 도리깨질 하는 식으로 되돌려서 시멘트 바닥에 내리치는 것이었다. 수십번인지 수백번인지 모르게 내리치니까 떼는 빠지겠지만 옷감의 손상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건강해 보이지도 않은 인도 사람들이 수백명 늘어서서 쉴새없이 빨래감을 휘둘러 내리치고 있는 것은 가관이었다.
 워터루 전쟁의 승자 웰링턴의 이름을 딴 유럽풍의 웰링턴 가든을 지나게 되었다. 오랫동안 영국의 제국주의 지배를 받았던 인도의 거리 이름이 영국인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것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일이어서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러나 웰링턴은 인도와 남다른 인연을 맺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의 형 웰슬리경은 영국지배 초기에 1798년부터 1805년까지 인도 총독을 지낸 사람이다. 웰슬리는 영국이 지배하는 동안 수십명의 인도 총독 가운데서 두번째로 젊은 38세에 부임하여 영령(英領)인도의 영토확장정책을 대대적으로 감행했었던 인물이었다.
 다음으로 유럽풍의 건물이 가득 들어찬 거리가 나타났다. 나 자신도 모르게 유럽에 와 있는 착각이 들었다. 이곳이 땅값이 가장 비싼 지역이며 아시아에서 제일 큰 사립병원도 이곳에 있다고 일러주었다.
 완전한 서구식 건물이 즐비한 봄베이 시가지의 서구화된 모습은 인도 최대의 상공업 도시임을 입증해 주고 있다.
 번화한 거리를 지나다가 확 눈에 들어오는 간판이 있었다. 대우 선전 간판이었다. 델리공항과 봄베이 공항을 빠져나오며서도 또한 보았지만 봄베이의 호텔 로비에서 우연히 지방신문을 뒤적이다가 대우 자동차의 전면광고를 본 일이 있다. 서구 동남아 심지어 이집트 공항에서도 보았던 바이지만 우리나라 대기업의 마크가 새겨진 핸드 케리어를 보았을 때는 단순한 반가움 뿐만 아니라 우리의 경제력, 더 나아가 국력이 이만큼 신장되었다는 것을 느낄 때 뿌듯한 마음이었다.
 봄베이란 푸르투칼어로 <좋은 항구>란 뜻인데 서구 세력으로서는 맨 처음 인도에 진출했던 포르투칼의 공주가 영국 욍실에 출가하면서 결혼지참금으로 넘겨준 항구도시였다.
 봄베이는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관할하게 된 이래 서해안 제1의 무역항의 역학을 했었다. 봄베이의 낭만적인 해안도로 마린 드라이브 산책코스를 한바퀴 돌았다. 줄지어 서 있는 야자나무 가로수, 줄지어 세워진 건축양식이 통일된 6∼7층의 고층 아파트, 아라비아 바닷물이 발아래 남실거리는 항구의 풍경은 서늘하고 멋진 곳이었다. 밤엔 항구에 면한 아파트의 등불이 아름다와 <공주의 목걸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마린 드리이브 밤의 풍경은 한층 낭만적일 것 같았다.
 겨울철인데도 봄베이는 30도 이상의 더위와 열대성 훈풍으로 여름처럼 더웠다. 인도는 겨울에 찾아볼 일이다. 야자열매로 목을 적시고 운전기사에게는 펩시콜라를 사주었더니 봄베이 높은 곳을 구경시켜 주겠다고 선심어린 제의를 해 왔다.
 산위로 올라가다가 자이나교 사원엘 들렸다.
 인도 서부 해안지방에서 상업하는 사람에게 많이 침투했었던 자이나교, 불교와 마찬가지로 브라만교의 횡포에 저항하여 개혁종교로 출현한 자이나교가 어떤 종교일까 평소에 궁금했었다.
 행깅가든으로 오르는 언덕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자이나교 사원은 우리나라의 옛 절간처럼 목재를 사용하였고 뜨락이 거의 없이 입구에서 몇 걸음 가까이 세워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사원에서 흔히 접하는 약간의 교교한 분위기는 전혀 없고 번잡스러웠다.
 사원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신발을 벗어야 했다. 깨끗하지도 않는 바닥에 신경이 쓰여 마음놓고 걸음을 옮기고 싶지 않은 정도인데가 지독한 향냄새가 쏵 끼쳤다. 사원 내부는 채색이 유별나게 화려했다. 둥근 기둥에다 녹색 비단을 감고 그 위에 금태를 휘감아 놓기도 하고 얼핏 느낌은 유치할 정도의 다양한 색상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이상한 것은 자이나교는 최초의 창조자로서의 신(神)도 믿지 않았고 영혼의 최고의 상태가 신이라고 보았는데 커다란 신상(神像)이 놓여져 있고 사람들이 꽃을 바치고 기원하는 광경이다. 만들어 놓은 신상은 자이나교를 일으켰던 교주 마하비라 일까? 시주인지 헌금인지 승려복을 입은 사람이 책상을 차려놓고 금전을 받기도 하였다.
 자이나교는 Jina(정복자)에서 유래하는 것으로서 이는 열정과 욕망을 정복한 사람을 의미한다. 자이나교를 일으킨 인물은 마하비라로 알려져 있지만, 자이나교에서는 마하비라를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로서가 아니라 종교개혁가로 보고있다.
 자이나교는 금욕생활과 불살생 이론을 특별히 강조하는 면에서 다른 종교와 매우 대조적이다. 지식과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극단적인 금욕주의가 강조되었다. 재산을 포기하고 지붕밑에서 사는 것을 그만두고, 머리카락을 자신의 손으로 쥐어뜯는 고행을 경험해야 한다. 단식하여 죽음에 이르는 것은 최고의 성스러움을 이룩하는 것으로 찬양되었다.
 자이나교에서는 재산을 갖지 말도록 계율로서 규정하고 있지만 여기에 재산이란 토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토지 이외의 재산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필요한 만큼 소유하라는 이론이 오히려 애매하게 큰 융통성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인도에서 자이나교 이재(理財)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들은 주로 정착상업, 금융업등을 통해서 엄청난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으며 한 때 인도 상거래의 반 이상이 자이나교의 수중에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막스 베버는 서양 프로테스탄티즘의 엄격한 금욕주의적 생활태도가 재산축적으로 이끌어 자본주의 발전에 공헌했다는 그의 이론을 자이나교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행깅가든은 말라바 언덕에 있는 공원으로 서울의 남산과 같은 곳이다.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 이르면 나그네의 고단함은 사라져 버리고 조금 더 머무르고 싶어진다. 아라비아 바다 옆으로 마린드라이브가 달리고 봄베이 시가지가 아름답고 평화스럽게 자리잡고 있는 그곳에.
 아라비아 바다 가운데 떠 있는 회교사원, 타타재벌 전시장을 지나 봄베이를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건조물 게이트웨이 오브 인디아에 당도했다. 항구에 튀어나온 석조의 장려한 문은 파리의 개선문과 흡사했다. 1911년 영국 국왕 조오지 5세와 메리왕비가 이곳으로 상륙했다고 하여 인도 방문 기념으로 세워진 거대한 문이며, 역대의 총독이나 지사 역시 이곳을 통하여 부임했다. 건축은 인도 양식이 가미되어 있어서 <인디아로 향한 문>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그 옛날 식민지 시대에 잉태된 쓰라린 과거의 잔재인 인도문은 지금도 묵묵히 영국과 인도의 과거를 역사적 유물로서 입증해 주고 있었다.
 게이트웨이 오브 인디아에는 상인들과 구경꾼들이 뒤섞여 마치 장터를 방불케 하고 번창한 상공업 도시에 걸맞게 대단한 규모의 타지마할 호텔이 그 위풍을 자랑하듯 버티고 있었다. 다음번 봄베이에 와서는 저 타지마할 호텔에 들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 곳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