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용철(경희대 사회과학대학 행정학과 86학번), 현 경기도 감사위원회 계약심사과장
경희대학교는 ‘문화세계의 창조’라는 창학 정신 아래, ‘학문과 평화’라는 대학의 가치를 중심에 두고 ‘대학다운 대학’을 지향해 왔다. 학원·사상·생활의 민주화라는 교육 이념을 일관되게 추구해 온 모교의 노력은, 학창 시절의 나에게는 다소 추상적인 구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사회라는 치열한 현장 속에서 부딪혀 보니, 그 말들이야말로 내 인생의 방향을 정해준 하나의 별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전후 한국 사회가 ‘성장의 압축 혁명’이라 불릴 만큼 놀라운 발전을 이룬 것처럼, 우리 모교 역시 짧은 시간 동안 비약적인 도약을 거듭하며 세상을 선도하는 대학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경희의 성장은 단순히 규모의 확장이나 외형의 변화에 머물지 않았다. 지식의 축적을 넘어, 대학이 무엇을 고민해야 하고 시대에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하는지를 함께 제시해 왔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더욱 깊다.
오늘날 대학은 급변하는 시대의 파고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잡는 공간이어야 한다. 인공지능이 세상의 질서를 바꾸고, 기후위기가 인류의 미래를 흔들며, 국제 질서가 빠른 속도로 재편되는 이 시기에도 지성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무엇을 위해 지식을 쓰고, 어떤 방향으로 인류 사회를 이끌 것인가.’ 경희가 추구해 온 ‘학문과 평화’는 바로 이 질문에 대한 가장 명징한 응답이었다. 이는 특정 시대나 이념에 머무는 가치가 아니라, 변화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기준이다. 재학생에게는 나아갈 방향을, 동문에게는 사회적 책임을, 그리고 학교 구성원 모두에게는 시대를 견인해야 할 사명을 일깨워주는 나침반이기 때문이다.
요즘 모교를 찾을 때마다 느끼는 점은, 경희가 여전히 ‘학문과 평화’의 정신을 시대에 맞게 진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인공지능과 기후위기, 국제 분쟁 등 새로운 도전 앞에서도 경희는 ‘인류 공동의 번영’이라는 근본적 목표를 잃지 않고 있다. 교정 곳곳에서 만난 후배들의 눈빛 속에는 여전히 탐구의 열정과 책임 있는 시민으로서의 자부심이 깃들어 있었다. 그들의 진지한 질문과 실천에서 나는 우리가 이어온 경희정신이 단절되지 않고, 오히려 더 깊고 단단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1986년에 경희에 입학해 졸업한 이후, 공직에 몸담아온 지난 30여 년 동안 경희정신은 내 삶과 공직생활 전반의 중요한 도덕적 준거점이 되어주었다. 공직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학창 시절 받은 장학금의 고마움을 후배들에게 전하고자 첫 월급 일부를 학교 발전기금으로 보탰다. 이후 ‘경희라이언클럽’을 통해 작은 정성을 이어왔고, 평화의 전당과 선승관, 최근 공과대학 분관 건립에도 동문으로서 마음을 함께했다. 크지 않은 실천이지만, 이는 학교로부터 받은 가르침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자, ‘문화세계’를 함께 일구는 동문으로서 자연스럽게 지녀야 할 기분 좋은 책임이라 생각한다.
사회가 빠르고 즉각적인 답만을 요구할수록, 깊이 질문하고 성찰할 여유를 제공하는 대학의 역할은 더욱 절실해진다. 전쟁과 강대국의 논리가 다시금 고개를 드는 혼란의 시대일수록, ‘학문과 평화’를 대학 정신의 근간으로 삼아온 경희의 목소리가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지금 교정을 걷는 후배들의 발걸음 위에서 그때 우리가 품었던 이상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본다. 그들의 길 위에서 경희의 평화 정신이 더욱 빛나기를, 그리고 그 나침반이 그들의 삶을 밝히는 별로 오래도록 남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