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섭 동문(법학 74)의 "나의 인생 2.5모작 이야기"


동문기고 정진섭 동문(법학 74)의 "나의 인생 2.5모작 이야기"

작성일 2022-01-18

나의 인생 2.5모작 이야기

2022년 1월 18일 09시 54분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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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섭 변호사는 첨단산업이나 지재권 분야에 대한 관심만큼은 여전하면서도, 워낙 빠른 속도로 변모하는 기술 발전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한다. /셔터스톡
반년 동안 쉬던 로톡 칼럼을 다시 쓰게 되었습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심기일전하는 마음으로 제 인생을 세 토막으로 나누어 되돌아보고자 합니다.

어느새 60대 후반이 된 저는 6.25 전쟁 직후 태어난 소위 베이비 붐 세대에 속합니다. 철도청 공무원이셨던 아버지 직장 가까운 동대문구 청량리동 속칭 '땟골동네'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그 후 학창 시절 주된 생활반경은 휘경동, 이문동, 석관동, 그리고 전농동이 거의 전부였습니다. 초등학교도 집 가까운 휘경초등학교를 다녔고, 경희대 병설 교육기관인 경희중학교에 입학한 후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까지 그대로 진학해서, 제가 다닌 학교는 경희 캠퍼스가 유일하다시피 합니다. 그게 저의 단조로운 인생 제1막이었습니다.

경희 법대 졸업 직후 1979년도 제21회 사법시험에 합격했습니다. 고시 공부 시절 실수나 실패도 없지 않았지만, 운이 좋게 법조인이 되었습니다. 당시 덕수궁 옆에 있던 사법연수원에 입소한 이래, 25년 동안 거친 파도가 일렁이던 검찰청에서 공직 생활을 했습니다. 평검사 시절 관운이 좋아, 일찍 프랑스 국립사법관학교 연수를 다녀오고, 주로 법무부, 대검, 서초동 법조타운을 맴돌면서 근무했습니다, 전국 최초의 지재권 전문검사라는 명성도 얻고, 컴퓨터 범죄 수사부서의 창설 당시 초대 부장도 맡았습니다. 지방 근무 시절에는 가족 모두 이사해서 행복한 전원생활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저의 인생 제2막은 기대보다 화려했습니다.

되돌아보니 세월이 강물처럼 흘러간다는 말이 실감 납니다. 공직 은퇴 후 잠시 모교인 경희대 법대 교수로 재직하다가 서초동으로 되돌아와서 평범한 변호사로 활동해 온 지도 16년이나 흘렀습니다. 요즘도 법조타운 터줏대감처럼 지내는 제게, 무슨 특별히 달라진 일도 없습니다. 여전히 지재권 사건을 주로 다루는 전문변호사를 자칭하면서, 그 분야 사건상담이 들어오면 반가워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 때문에 방문 상담이 크게 줄어든 탓에, 비대면 상담을 활성화해 보려고 이런저런 방도를 찾아보기도 합니다. 그러니 감히 인생 제3막을 살고 있다고 말하기가 민망합니다. 그저 인생 2.5모작이 적당한 표현일 듯합니다.

뜬금없는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첨단산업이나 지재권 분야에 대한 관심만큼은 여전하면서도, 워낙 빠른 속도로 변모하는 기술 발전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컴퓨터 Early Adaptor가 되려고 노력했지만, 지금은 뒤늦게 쫓아가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편입니다. 휴대폰도 10년 넘게 iPhone3과 6플러스로 버티다가, 최근에야 삼성 갤럭시 ZFlip3 할인행사에 참여해서 안드로이드 폰으로 교체했습니다. (알뜰하고 슬기로운 컴퓨터 생활과 새로운 공부 거리에 관한 에피소드는 추후 연재하겠습니다.)

최근 수많은 사회갈등 이슈나 법률 현안을 관찰하면서, 스스로 약간 달라진 것은 '인간 존엄'이라는 헌법정신에 더욱 공감하게 된 점입니다. 인류 보편의 최고가치인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창의'가 사회 일각에서는 물질적, 이념적, 그리고 사상적 가치보다, 심지어 진영논리보다도 경시되는 경향이 매우 깊어졌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하나의 물방울이 바다에서 일어나 바다로 되돌아가듯이, 우리의 육신은 무(사랑)에서 비롯되어, 무(합일)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순리이며,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강물은 바다에 가까워질수록 강폭이 넓어지고 여유로워지듯이, 누구든지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마무리하고 싶어 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문득 명경지수(明鏡止水)라는 말을 떠올려 봅니다. 사람이 자기 모습을 보려면 거울이 필요합니다. 맑고 고요한 물가에 가면 거울이 아니라도 자기 모습을 비춰볼 수가 있습니다. 그와 같이 누구든지 인간의 본성과 정체성을 바로 이해하고, '인간 존엄'의 소중함을 깨닫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지성'이라는 거울이 필요할 것입니다. 비록 평범한 사람이라 해도, 정말로 인간의 본성과 정체성을 알고자 하는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스스로 진면목을 밝혀 나간다면, 누구든지 자기 자신의 지성을 날로 계발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감히 인간 본성에 대한 지성적 통찰을 제 인생의 3모작 과제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릴 적 평범하기 이를 데 없이 자랐고, 약간 오만하고 화려했던 인생 제2막을 지나서, 지금은 다시 평범한 처지로 되돌아온 저에게 이만큼 안성맞춤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누구 하나 예외 없이, 인간 본성에 대한 지성적 이해는 우리들 모두에게 최종적이며 숙명적 과제가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