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기고
김찬규-위안부 문제와 일본의 허구
[시론―김찬규] 위안부 문제와 일본의 허구
- 김찬규(박사과정 22회) / 경희대 명예교수·국제법 -
얼마 전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에 일본 정부가 관여한 직접적 증거는 없다고 말해 국제적 분노를 샀다. 16일에는 일본 각료회의가 이를 뒷받침하는 공식 견해를 채택해 분노는 가열되고 있다. 군대 위안부란 2차대전 때 일본이 일본군의 성적 위안을 목적으로 한국 중국 그리고 점령지였던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각지에서 강제동원한 부녀자를 일컫는다. 그 수가 20만명에 이르며, 대부분 작고하고 지금은 얼마 안되는 생존자가 있을 뿐이다.
주된 피해자가 한국 여성이어서 한국에서 먼저 불거진 군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은 처음 그 존재 자체를 부인했다. 하지만 증인 및 증거가 연거푸 나타나 부인이 어렵게 되자 민간 업자가 저지른 소행일 뿐 정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잡아뗐다. 그 후 거듭된 인적·물적 증거의 발굴로 그마저 어렵게 되자 1993년 8월4일 마침내 정부 차원의 관여를 인정하고 사과를 내용으로 하는 ‘고노 담화’가 나왔다.
주인공 고노 요헤이는 당시 관방장관이었으며 지금은 중의원 의장이다. 일본 내각 직제상 관방장관은 정부 대변인이기에 이 담화는 정부 차원의 관여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 된다. 아베 총리 자신도 취임 직후인 작년 10월3일 ‘고노 담화’를 승계한다고 공언한 바 있다. 그럼에도 총리가 일구이언할 뿐 아니라 내각 전체가 이에 부화뇌동하고 있으니 이 사태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1919년 7월22일 노르웨이 외무장관 일렌(Ihlen)은 자국 주재 덴마크 공사에게 피츠베르겐에 대한 노르웨이 영유권을 인정해주면 국제회의에서 그린란드 전체에 대한 덴마크의 영유권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 ‘일렌 선언’에도 불구하고 노르웨이가 1921년 그린란드 동부에 진출하기 시작해 1931년 이곳을 선점했다고 주장하자 덴마크는 상설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했다. 재판소는 1933년 4월5일의 판결에서 “장관이 자기 직무 범위 내에서 행한 언명 또는 정책 표명은 국제법상 당연히 그 나라를 구속하며 헌법상 권한 유무를 근거로 타국에 대항할 수 없다”고 했다.
유사한 경우는 핵실험 사건에 대한 1974년 12월20일의 국제사법재판소 판결에서도 발견된다. ‘고노 담화’는 권한 있는 각료가 정부를 대신해 사실에 관한 확인을 한 것이기 때문에 그 효과는 당연히 정부에 귀속되며 총리가 바뀌었다고 해서 달리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 국제법적 평가다. 아베 총리 및 일본 내각의 작태는 이러한 맥락에서도 위법이지만 국제법상 확립된 또 하나의 원칙 ‘금반언(禁反言·estoppel)’ 에도 위배된다. 이것은 단적으로 일구이언하면 안 된다는 원칙이다.
증거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1946년 10월22일 영국 군함 4척이 코르푸해협의 알바니아 영해 부분을 통과하다 기뢰에 부딛쳐 2척이 대파되고 많은 사상자가 났다. 분쟁이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돼 법정에서 영국이 사과 및 손해배상을 요구하자 알바니아는 자국이 기뢰를 부설한 적이 없고 부설된 사실을 알지도 못했다며 책임을 부인했다.
이에 대해 재판소는 1949년 4월9일의 판결에서 타국의 배타적 지배하에 있는 지역에서는 간접증거로서 족하다며 알바니아의 책임을 인정했다. 이유는 그러한 곳에서 직접증거를 찾는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아베 총리 및 일본 내각이 직접증거가 없다며 위안부 강제동원 책임을 회피하는 작태는 재판상의 선례에 의해 확립된 국제적 기준에 위배된다. 책임을 솔직히 인정함이 일본을 위한 일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국민일보 2007-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