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일-개헌안,확실한 처방전인가


동문기고 노동일-개헌안,확실한 처방전인가

작성일 2007-05-25

[fn시론] 개헌안,확실한 처방전인가

- 노동일(법학 77/29회) / 경희대 법대 교수 -
 
청와대가 개헌안 시안 3가지를 발표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잇따른 기자회견에 이어 국무위원들을 상대로 ‘개헌 특강’을 하면서 개헌 발의의 정당성을 역설했다. 대선주자들이 개헌공약을 구체적으로 내놓으면 개헌 발의를 유보할 수도 있다고 한 노 대통령의 제안이 별다른 반향을 얻지 못하는 상황에서 청와대가 물러설 명분은 없어 보인다.

이달 말 혹은 4월 초 개헌안 발의가 기정사실화되면서 개헌 제안의 정치적 의도나 개헌 시기를 두고 벌이는 논란은 사실상 무의미해져 버렸다. 청와대가 오늘부터 예정된 개헌안 공청회 등에서 개헌안 시안을 놓고 토론을 벌이도록 하겠다고 밝힌 것을 보아도 이제는 개헌안 자체의 타당성에 대해 논의가 집중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찬반이 아니라 객관식 답안지에 대한 한 가지 선택을 요구받는 상황이 될 경우 개헌에 관한 국민들의 의사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개헌안에 대한 국회 논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잣대는 정치인들의 유·불리를 따지는 당리당략이 아니라 국민의 의지가 돼야 하기 때문이다. 1987년 직선제 헌법 개정에서 보듯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아닌 국민적 의사가 집약될 때 개헌은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 되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지난 13일 국무회의에서 “대통령 5년 단임제, 국회의원과 대통령의 임기 불일치, 이 제도야말로 갈등을 통합하기가 가장 어려운 제도”라는 말로 개헌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대통령제를 채택하면서 4년 중임제가 아닌 5년 단임제는 역사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상당히 부자연스러운 제도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가 맞물리는 게 자연스러운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개헌안 시안은 또 다른 차원의 부자연스러운 제도를 낳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1년 미만의 대통령 궐위시 국민에 의해 선출되지 않은 국무총리가 1년 가까이 대통령직을 대행해야 하는 상황도 그렇고 최악의 경우 1년 남짓한 임기의 대통령을 뽑기 위해 대선을 치러야 하는 설정도 그렇다. 어느 쪽이든 현실화될 경우 국민주권과 대통령 직선제의 의미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기형적 제도다. 선거 횟수를 줄여야 한다는 전제와 함께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일치에 치중하다 보니 나타난 어쩔 수 없는 결과일 것이다.

대선과 총선을 함께 치르는 것도 우리나라의 정치 풍토에서는 특히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는 여당이 언제나 국회 다수당이 돼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대통령이 국회 다수당 권력의 뒷받침까지 받을 경우 얼마나 독선적이고 비타협적인 국정운영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유신과 함께 유정회를 만든 것도 대통령과 국회 권력의 일치를 염원한 결과다. 우리처럼 민주화된 사회에서 더 이상 권력 독점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단언은 인간과 권력의 선의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수사일 뿐이다.

이런 제도의 허점만 놓고 보더라도 현재의 개헌 논의는 지나치게 서두르고 있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개헌의 전제다. 한 마디로 대통령 4년 연임제,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 일치 문제 등이 정치·국민의 갈등조정과 직접 관련이 있다는 가정에는 동의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현행 헌법을 시행한 지 20년이 됐지만 대통령 단임제의 문제점에 대한 실증적 평가는 나온 적이 없다. 현직 대통령을 포함한 직선제 대통령들의 정치적 실패 사례가 단임제 때문이라는 결론은 너무 피상적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많은 갈등의 근원은 헌법 때문이 아니다. 그 중 큰 몫은 대통령이 국민 전체의 대표자라는 인식보다 한 정파의 수장이나 자신의 지지자들만 대표한다는 잘못된 인식에서 기인한다. 대통령이 앞장서 야당을 공격하면서 정책에 대해 야당이 협조하지 않는 탓에 국정운영이 어렵다는 불평을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우리 사회의 모순에 대해 이른바 ‘87년 체제’라는 알듯 모를듯 한 이데올로기의 딱지를 붙이고 헌법 체제를 바꿔야 한다는 논리도 지나친 비약이다.

헌법은 일점 일획도 고칠 수 없는 신성한 문서가 아니다. 헌법을 바꿔 나라와 국민이 행복해진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지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헌법 개정에 앞서 필요한 것은 권력의 자기 성찰을 포함한 우리 사회의 정치적 실패에 대한 철저한 원인 규명이다. 확실한 진단 없이 서둘러 내놓는 어설픈 처방은 환자의 병을 더 깊게 할 뿐이다. 
 
[파이넨셜 뉴스 2007-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