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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일-‘위안부’와 안네 프랑크
[도정일 칼럼] ‘위안부’와 안네 프랑크
- 도정일(영문61/13) / 경희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
미 하원 위안부 비난 결의안 통과를 저지하려는 일본 정부의 노력, 아베 신조 총리의 발언, 일본 극우 세력의 움직임을 보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대응은 전후 나치 전범들과 신나치주의 파시스트들이 추구한 대응 전략과 너무도 비슷하다. 역사적 사실을 극구 부정하는 것이 꼭 닮았고 기억을 멸살, 왜곡, 변조하는 것도 빼다 박은 듯이 닮은꼴이다.
피해 여성들이 ‘실존의 몸’으로 나서서 증언하고 관련 증거들이 나와 있는데도 일본 정부는 “위안부 강제 동원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대학살 같은 것은 없었다”고 말하는 신나치 집단의 ‘부정의 전술’ 그대로다.
-“위안부 없었다” 버티는 일본-
기억의 멸살과 왜곡 전술도 유사하다. 신나치 집단은 피해자들의 기억이 조작, 과장된 것이며 “증거가 없다”고 몰아붙여 아무도 믿지 않는 ‘카산드라의 언어’ 같은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 가해자들의 기억도 왜곡, 변조해서 “우리는 그런 짓을 한 적이 없다”거나 전쟁 중에 있었던 일은 국가에 대한 충성과 명령 수행의 결과였다는 쪽으로 미화한다.
일본 우익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베 총리의 발언처럼 국가나 군대가 위안부를 강제 동원한 증거는 없고 ‘피해자의 기억’은 증거 능력이 없다고 그들은 말한다. 일본 우익이 노리는 것은 ‘버티기 작전’이다. 이 작전은 증거가 없다고 끝까지 버티자, 피해자들은 거의 80대 고령이므로 이제 몇 년만 지나면 자연의 시간이, 혹은 신이, 사건을 종결시켜 줄 것이라는 계산을 깔고 있다.
이런 부정과 버티기의 한 유명한 사례가 “안네 프랑크는 없었다”라는 주장이다. 전후 네덜란드 파시스트들은 안네 프랑크라는 이름의 소녀가 실존한 적은 없다, 그러므로 그녀가 썼다는 ‘일기’는 연합국 세력이 조작한 선전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나선다.
이 부정의 전술을 격파한 것은 유대인 절멸수용소에서 살아남아 전후 나치 범죄자들을 추적하는 일에 평생을 바쳤던 시몬 비젠탈이다. 1963년 그는 칼 실버바우어라는 전직 나치 경찰을 찾아내어 자백증언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다. 비젠탈의 추궁 앞에서 실버바우어는 “그렇다, 내가 안네 프랑크를 체포했다”고 실토한 것이다.
국제사회는 일본이 수치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라는 것이지 일본에 수치를 ‘안기고자’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지적은 지금 일본의 지배 세력들에게는 전혀 먹혀들지 않는다. ‘쇠귀에 경 읽기’다.
일본이 부정과 버티기로 일관하는 한 국제사회는 일본의 이런 처신이 그 자체로 수치스러운 신나치적 행태라는 것을 일본 정부에 혹독히 인식시킬 필요가 있다. 20만명의 여성들을 끌고 다니며 폭행, 학살, 방기를 자행한 것은 나치 만행에 견줄 만한 거대 범죄이고, 지금 일본은 그 만행을 부정하는 신나치적 만행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본 정부가 깨우치게 해주어야 한다. 미 하원이 위안부 결의안을 채택하는 것은 분명 국제사회가 일본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의 하나다. 도쿄 전범재판 때 위안부 강제동원 책임자들을 가려내어 처벌하지 못한 것은 연합국 측의 실수다. 이 점에서는 미국에도 위안부 문제 처리에 대한 일정한 도덕적 책임이 있다.
-역사왜곡 신나치와 닮은꼴-
우리도 책임을 면탈 받기 어렵다. 대통령이 나서서 과거 청산을 촉구하는 강도 높은 대일 발언을 한 것은 지금의 참여정부가 사실상 처음이다. 피해자들의 증언과 기억을 푸대접하고 그들의 존재조차 잊어버리고자 한 우리 사회의 집단 망각의 책임은 크다. ‘홀로코스트’(대학살)에 대한 기억의 집적, 연구, 기록, 작품의 양에 비하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우리의 증거수집, 연구지원, 피해자 보호, 경험 소재의 작품화 노력은 실로 미미하다. 기억의 보존 수준이 한 사회의 도덕적 역량을 좌우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 우리에게도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경향신문 2007-0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