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일-한국에서 민주주의는 ‘되었다’고?


동문기고 도정일-한국에서 민주주의는 ‘되었다’고?

작성일 2007-05-22

[비판적상상력을위하여] 한국에서 민주주의는 ‘되었다’고?
 
- 도정일(영문61/13회) / 경희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
 
한국에서 정치를 말한다는 것은 한 군데도 볼만한 구석은 없이 사시장철 사람 만정 떨어지게 하는 혐오스런 괴물을 묘사하는 일과 비슷하다. ‘한강의 괴물’이 따로 없다. 이 정치의 괴물성을 다스릴 필요가 있다. 대선 준비의 계절에 한양 이선달에서부터 제주 고을라에 이르기까지 유권자들이 토론을 일으키는 일은 그래서 아주 중요하다. 유권자들만이 정치를 고쳐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여기저기서 전개되고 있는 토론들을 보면 흥미로운 현상이 하나 눈에 띈다. “이제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는 되었으니”라 상정해놓고 들어가는 어법, 태도, 인식이 그것이다. 이 인식법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이제 한국사회에서 더 이상 토론거리도, 이슈도, 과제도 아니다. 민주주의는 ‘되었기’ 때문이다. 논자에 따라서는 ‘웬만큼’을 붙여 “이제 민주주의는 웬만큼 되었으니”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사정은 마찬가지다. ‘웬만큼’ 된 것도 된 것이니까 더는 민주주의 문제로 왈가왈부 할 것 없다, 2007년 대선 정국에서 민주주의 문제는 토론거리일 수 없다는 인식이 거기 여전히 깔려 있다.


올해 대선정국에서 이슈도 안된다는 ‘민주주의’는
‘자 도착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산꼭대기가 아니다
‘다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는 냉장고도 아니다
200년 역사의 미국에도 ‘민주주의’란 항구적 과제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인식법이 소위 보수논객은 물론 이른바 진보를 자처하는 논자들 사이에서도 무슨 합의사항처럼,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기정사실의 확인처럼, 광범하게 공유되고 있다는 점이다. 소위 보수논객들이 그렇게 말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이제 민주주의는 되었지 않은가, 그러니 어떤 정치 세력의 민주적 능력 유무를 대선 이슈로 삼을 필요는 없다, 다른 더 중요한 문제를 거론하자는 것이 그 이유다. 그들이 ‘다른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들의 목록 첫머리에 올라 있는 것은 ‘경제’다. 그들이 보기에 경제문제는 현임 정권이 확실히 실패한 영역이다. 민주화 세력임을 자처하면서 개혁을 주장하고 나선 현임 정권이 민생을 도탄에 빠뜨린 이상 더는 ‘민주화’니 ‘민주적 개혁’이니를 주장하는 세력에 정권을 맡길 수 없다, 경제를 아는 정치세력에 다음 정권을 넘겨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이른바 진보논객들이 민주주의 문제를 논외로 삼고 싶어 하는 데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그들이 보기에 현임 정권은 무능하고 서투르다. 참여정부는 민주주의에 대한 헌신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천하에 ‘입증’했기 때문에 더는 민주화 세력이냐 아니냐를 핵심 이슈로 삼을 필요가 없다- 이런 생각이 소위 진보를 자처하는 논객 상당수의 머리를 암암리에 지배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민주주의 문제를 내걸어서는 더 이상 ‘장사’가 안 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제 민주주의는 되었다”라거나 “웬만큼 되었다”는 생각과 주장, 인식과 어법은 사실은 흥미로운 것이기는커녕 지금 이 시점에 우리가 지적하고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심각한 판단오류이다. 민주주의는 어느 시대에도 ‘완성’되거나 ‘완결’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자, 이제 우리는 도착했다”고 말할 수 있는 북한산 꼭대기나 보스톤 마라톤 종착점 같은 것이 아니고, 냉장고나 자동차, 책상, 의자처럼 “봐라, 우리가 다 만들었다”고 종결과 완성을 선언해도 될 무슨 제작품목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부단한 진화와 발전을 거듭하는 ‘과정’이다. 거기에는 종착점이 없다. 더 중요하게도,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는 대단히 연약하고 수많은 위기와 도전의 풍랑 앞에 언제나 노출되어 있다. 한 순간의 방심, 자만, 오판만으로도 민주주의는 반전, 후퇴, 소멸의 위기에 빠질 수 있다.

정치를 말하고 민주주의를 말하는 사람들이 이제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되었다”고 생각하거나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다. 민주주의는 독재를 무너뜨린다고 해서 ‘자동’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고 겨우 몇 번의 ‘문민정부’ 실현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민주주의 비슷한 것을 실현한 지는 이제 겨우 15년에 불과하다. 80년대의 민주화 항쟁시대를 다 넣어 계산해도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는 4반세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짧은 연륜의 민주주의를 가진 나라 사람들이 이제 민주주의는 되었으니 그 문제는 더 이상 논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순진이 아니라 자만이며, 이런 가당찮은 자만이야말로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의 하나다.

우리가 사회민주화를 전혀 성취하지 못했다는 소리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지난 시절 험난한 민주화의 과정을 거쳐 일정 정도의 민주주의를 이루어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성취가 “이제 민주주의는 되었다”고 말해도 될 자기만족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문제는 ‘자만’이다. 세계 역사상 최초로 민주주의를 제도화하고 체제화했던 미국에서도 민주주의는 여전히 항구한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과제로 인식되고 있다. 민주주의 2백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도 자만을 부단히 경계하면서 ‘민주주의 지키기’를 제1의 정치적 사회적 교육적 의제로 삼고 있다. 그런데 이제 겨우 15년, 25년의 민주주의 발전사를 가진 나라 사람들이 “민주주의는 되었다”고? 남의 나라 얘기를 자꾸 해서 안 됐지만, 민주주의는 미국이 내거는 최대의 국가정체성이고 “나는 민주주의의 시민”이라는 것이 인종과 계층을 떠나 미국인이 자기정체성을 규정할 때 머리에 떠올리는 첫 번째 명제다. ‘나는 민주사회의 시민’이란 것으로 자기 정체성을 규정하는 한국인은 도대체 몇이나 될까? 정치인, 논객, 언론을 위시해서 사회 구성원 상당수가 터무니없는 자만에 빠져 민주주의 지키기의 절대적 필요성을 망각하고 있다.

한국 민주주의는 여전히 수많은 도전과 위기를 만나고 있다. 아직도 민주주의의 명제와 원칙, 그 가치와 규범을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고 사회적 삶의 모든 단계에서, 한참 더 익히고 성숙시켜 나가야 하는, 말하자면 걸음마 단계의 것이다. 자유, 평등, 인권의 확대와 확장은 여전히 우리에게 거대한 과제이다. 경제는 중요하다. 그러나 재벌기업 비호세력들이 경제를 내걸어 시민의 자유를 옥죄고 허위에 대한 혐오의 능력을 잃어버린 언론조직들이 자유의 이름으로 진실을 비트는 나라에서 정치논객들이 “민주주의는 되었으니” 이제 잊어버려도 된다는 식으로 말한다면 한국 민주주의는 어찌 되는가?

[한겨레 2007-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