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기고
장성구-집지서(執贄書)
[논단―장성구] 집지서(執贄書)
- 장성구(의학71/25회) /경희대 교수· 의학전문 대학원 -
학문의 길을 갈고 닦는 사람이든지, 장인의 길을 연마하는 사람이든지, 혹은 예체능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든지. 누구를 막론하고 어떤 스승이 어떤 제자를 만나는가가 스승과 제자 모두의 인생 성패를 가름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영역 272년 정사 9월 24일에 단양인 장석인(張錫寅)은 삼가 목욕 재계하고 글을 지어 금계(錦溪)선생님께 재배의 예를 드리나이다. 선생님의 드높은 덕을 저의 조그만 견해로 엿볼 수 없습니다만 (중략) 오늘 찾아와 대문 밖에서 가부의 말씀을 기다리오니 삼가 바라건대 저를 제자로 받아들이셔서 찾아온 뜻을 저버리지 않게 하여 주소서.”
이글은 조선 말 기호 지방의 거유(巨儒)였던 금계(錦溪) 이근원(李根元)에게, 같은 기호 지방의 유학자였던 장석인이 지천명이 지난 나이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찾아가 제자가 되고자 하는 간곡한 뜻을 스승께 올린 집지서의 일부다. 스승의 인격과 학문적 도량을 우러러보고 찾아가 제자가 되고자 하였으니 스승의 뜻과는 전혀 관계없이 제자가 스승을 찾은 것이다.
의대 6년을 졸업하고 보다 전문적인 의학 영역을 공부하기 위하여 총 5년간의 전공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이때 소위 의사로서 자기 전공을 정하게 된다. 전공을 정할 땐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작용한다. 다시 말해 자기가 특정 의학 분야에 관심이 많을 경우 그 길을 걷게 되지만, 스승의 학문적 위대함이나 근엄한 인격에 이끌리어 그 스승 밑에서 공부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이 역시 스승의 뜻에서 시작된 일이 아니라 제자 스스로 스승에게 제자 됨을 허락 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초·중·고교 교육은 학교라는 집단에서 수학적 계산에 의하여 반을 나누고, 학교의 정책적 결정에 의하여 담임선생님이 정해지는 제도다. 담임선생님이 제자를 선택한 것도 아니고 제자가 스승을 선택하고 제자 됨을 허락받는 일도 아니다. 현대와 같은 대단위 집단적 교육 제도 아래서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과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제도에서 발생되는 비교육적 부작용이나 탈 인간화의 문제를 간과하여 왔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들 중에 극히 일부에서는 스승으로서의 책임감이나 덕목으로부터 너무나도 쉽게 해방되어 정치적 목적으로 거리를 헤매는 분들도 생겨났고, 사랑의 회초리가 아닌 폭력이 가해지는 일도 발생했으며, 스승의 하찮은 꾸지람에도 학생들 스스로가 경찰을 학교 내로 부르는 일이 생기는가 하면 학부모가 자식의 선생님에게 폭행을 가하는 등 실로 상상하기도 싫은 일들이 교육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다.
현대와 같은 핵가족 사회에서는 가정 교육은 없어지고 학교 교육만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학교에서의 인성 교육은 이처럼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지고 있다. 더 이상 방치할 수 없고 시급히 해결하여야 할 교육 분야의 병폐 중 병폐다.
이런 현실 속에 최근 몇몇 학교에서 학생들이 담임선생님을 선택하는 제도를 시범적으로 운영한다는 소식은 여러 의미에서 신선한 충격이다. 선생님, 학생, 학부모 모두에게 일정한 권한과 의무가 동시에 부여되는 발전적 제도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발전적으로 정착되기를 기대한다.
[국민일보 2007-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