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기고
정진영-표정 관리하는 김정일
[릴레이시론]표정 관리하는 김정일
②각국의 득실
- 정진영 / 경희대 교수·국제 관계학 -
우리나라의 안전보장과 직결된 주변 국가들이 한국안보의 최대 위협요인인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관련된 협상을 성공적으로 타결했다는 소식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2·13 베이징 합의문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환영 일색일 수만은 없다. 이번 합의는 북한 핵무기의 폐기라는 한국의 국가 이익과는 아직 상당한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두 가지 측면에서 특히 그러하다. 첫째, 이번 합의는 북한이 핵물질을 추가로 생산할 수 있는 핵시설과 이미 보유하고 있는 핵물질 및 핵무기를 구분해 핵시설의 가동중단 또는 불능화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따라서 핵무기의 폐기를 위해서는 전혀 다른 차원의 협상이 필요하다. 그런데 북한이 핵을 포기하려 하지 않을 것이란 점을 고려할 때, 이번 합의는 북한의 기존 핵무기나 핵물질을 사실상 암묵적으로 인정해 준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둘째, 핵시설의 폐쇄나 불능화 조치도 북한의 의도에 따라 매우 불확실한 상황에 빠질 수 있게 되었다. 북한의 핵 시설이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무엇을 폐쇄하고 어떻게 불능화시킬 것인지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북한으로 하여금 모든 핵시설을 신고하도록 요청하고 있으나 이 문제에 관한 한 북한뿐 아니라 어느 나라도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할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렵다. 불능화 조치의 시기와 수준에 따라 추가적인 대북 지원의 시기와 규모를 연계시켜 놓고 있지만 무엇을 어떻게 불능화시킬 것인지를 둘러싼 지루한 공방이 예상된다.
‘2·13’ 6자회담 합의의 이러한 성격을 놓고 볼 때, 이번 타협의 최대 승리자는 역시 북한이다. 북한은 이번 회담을 통해 작년 핵실험에 따른 유엔안보리의 제재조치를 실질적으로 해제했고 미국 및 일본과의 수교협상을 시작할 수 있게 됐으며, 한국 등으로부터 대규모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우선 북한은 영변 핵시설의 가동을 중단하는 대가로 일단 5만t의 중유를 지원받게 된다. 그리고 한국이 지원을 중단해 왔던 55만t의 쌀, 35만t의 비료, 800억원 상당의 경공업 원료 지원이 곧 이루어질 전망이다. 북한이 직면하고 있는 식량난과 에너지난을 돌파할 길을 여는 데 성공한 셈이다.
그러면 미국은 왜 이러한 타협에 주도적으로 임했을까. 우선 이라크 문제로 곤경에 처한 부시 행정부의 외교적 성과 추구가 주요한 원인으로 지적된다. 부시 행정부는 ‘나쁜 행동에는 보상이 없다’는 스스로의 원칙을 깨면서까지 북한과의 타협에 응했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미국의 능력과 수단에는 명백한 한계가 존재한다.
중국은 북한 붕괴를 막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이다. 북한 핵 개발에 분명히 반대하지만 이를 저지하기 위한 국제적 압박이 북한의 붕괴를 초래하는 것도 반대한다. 따라서 협상을 통한 해결을 강조하며, 특히 자국이 주도하는 6자회담의 틀을 통한 해결을 선호한다. 이에 비해 러시아와 일본은 별다른 역할도 하지 못한 채 부담만 떠안는 것을 껄끄럽게 생각한다. 일본은 북한 핵 폐기라는 궁극적 목표 달성을 위한 전망도 서지 않은 가운데 미봉책이 마련되고 대북 지원이 이루어지는 것에 매우 불만족한 표정이다.
한국 정부는 2·13 베이징 합의를 대북 지원 재개의 신호로 받아들이고 이를 위한 남북회담을 서두를 것으로 보인다. 북한 핵문제보다 남북정상회담 예측이 더 많은 관심을 끌 것이다. 남한의 대통령 선거에 개입하려는 의지가 분명한 북한 당국과 남북관계에서라도 돌파구를 찾아보려는 여권의 간절한 심정이 어떤 이벤트를 만들지 벌써 궁금하다.
[세계일보 2007-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