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기고
도정일-타락한 문화가 ‘석궁’을 쏘았다
[비판적상상력을위하여] 타락한 문화가 ‘석궁’을 쏘았다
- 도정일(영문61/13회) / 문학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
완전히 개인주의적이거나 집단주의적인 문화는 없다
한국 문화이동 패턴은 집단주의→개인주의 대이동
문제는 ‘개인+집단’ 악성조합이 우리 사회 지배
매일 터지는 수백건 사건이 타락한 문화상의 증거
한때 국제 학계에서는 집단주의와 개인주의라는 두 개의 축 가운데 어느 쪽으로 더 쏠리는가에 따라 세계 여러 지역의 문화적 차이를 규정해보려는 연구를 꽤 열심히 진행했던 적이 있다. 새뮤얼 헌팅턴이 ‘문명충돌론’을 들고 나와 문화에 대한 사회과학의 관심을 정치학 쪽으로 납치하게 된 1990년대 초반까지 10년 남짓 사회학, 인류학, 심리학 같은 분야의 상당수 연구자들을 매료했던 것이 바로 그 집단주의 대 개인주의라는 화두다. 당시의 연구들을 보면 북서유럽 국가들 대부분이 ‘개인주의 문화’의 강세지역에 속하는 반면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남부 유럽 일부 국가들이 ‘집단주의 문화’의 강세지역에 속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 계열의 연구들은 그 방법론이 너무 단순하고 연구에서 얻어진 발견들도 상식을 크게 넘어서지 못할 정도로 진부한 것일 때가 많다. 집단주의 문화가 개인의 행복보다는 집단의 이익과 명예를 중시하고 개인의 자유보다는 가족 등 친밀집단에 대한 충성을, 수평적 평등관계보다는 수직 위계서열과 상부권위에 대한 숭상을, 개인의 도드라짐보다는 집단의 내부 인화와 화합을 더 중하게 여긴다. 속담을 빌리면 개인주의 문화에서는 ”시끄러운 바퀴에 기름“ 칠해주고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주는 반면 집단주의 문화에서는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집단을 앞세우는 문화에서는 소속 집단에의 무조건적 복종이 강조되고 소속원들은 자기 집단을 위해 기꺼이 싸울 것은 물론 목숨까지 바칠 용의도 갖고 있다. 집단문화에 대한 이런 식의 기술은 이미 낯익은 것이다. 집단주의 문화의 가치서열을 거꾸로 뒤집어 놓으면 소위 ‘개인주의 문화’가 된다는 식의 주장도 별로 새로울 것 없어 뵈는 얘기다.
그렇다고 해서 그 1980년대식 문화연구에 귀담아 들을만한 발견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개인주의 문화권에서 ‘가치’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반드시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동일한 액면가를 발휘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주의적 가치들은 인간사회의 문화적 ‘보편’이 아니라 ‘특수’이며 지역적 크기로 따져도 세계의 70%는 오히려 집단주의 문화의 특성들을 갖고 있다, 그러나 경제적 번영과 사회적 지리적 이동성이 높아지면 질수록 개인주의적 가치들이 우세하게 나타나고 개인주의가 개인이기주의로 변질하는 정도도 높아진다, 이런 문화적 변동은 상당한 위험성을 안고 있다- 당시 연구자들이 내놓은 이런 발견은 지금도 경청할만한 것들이다.
민주사회라고 해서 반드시 개인의 이익만을 앞세우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 역시 당시 연구가 내놓았던 발견 사항의 하나다. 미국과 달리 유럽 국가들의 경우에는 지금도 개인의 품위와 그의 사회적 책임을 나란히 강조하는 건강한 개인주의 문화 모델들이 존재한다는 주장도 당시 연구에서 나온 발견의 일부다. 한때 미국의 개인주의는 개인의 행복과 이익 말고도 공동체의 가치를 존중할 줄 알았으나 현대 미국의 개인주의에서는 다른 어떤 고려사항보다도 개인 이익의 최대화가 가장 중요하다. 지금의 미국 백인 중산층 사람들은 자신을 개인적 특성, 선호, 욕망의 집합으로 정의하는 반면 아시아 문화에서는 사람들이 사회관계의 망 속에서 자기 위치를 규정한다. “그래서 내게 득 되는 것이 뭐지?”가 현대 개인주의의 지배적 질문 방식이다. 그러나 만사를 개인 이익을 잣대로 해서 따지고 드는 극단적 이기주의 성향이나 탐욕은 인간본성의 항구한 법칙도 보편사항도 아니다- 이런 주장도 지금의 경제학이나 생물학이 들으면 웃을 소리 같지만 그 80년대 연구들이 내놓았던 발견의 일부다.
어떤 문화도 완벽하게 집단주의적이거나 개인주의적이지 않다. 80년대 문화연구자들이 설정했던 집단주의/개인주의의 구별 역시 순진한 2분법의 적용이기보다는 학문적 연구를 위한 순수모델, 또는 ‘아이디얼 타이프’의 일종이다. 중요한 것은 사회변화가 어떻게 문화변동을 유도하고 가치체계를 서서히, 때로는 급격하게 변화시키는가라는 문제다. 지난 30년 혹은 40년간 우리 사회에 발생한 변화들, 특히 경제적 변화가 현대 한국인의 가치관, 인생관, 정체성 규정방식, 교육목표 등 문화적 차원에 일으켜 온 지형변화는 실로 심대한 데가 있다. 전체 그림을 놓고 보면 가장 현저한 문화변동의 패턴은 ‘집단주의적 문화로부터 개인주의적 문화로의 대이동’이다. 이 이동 패턴의 어떤 부분은 정치 민주주의나 개인의 품위 향상 등 사회발전이나 인간발전에 긍정적인 것인 반면 어떤 부분은 아주 부정적이다. 이 부정적 변화들 중에서 우리가 백번도 더 주목할 것은 1980년대 연구자들이 집단주의/개인주의로 분류한 문화적 특성들 가운데 가장 나쁜 것들을 용케도 골라서 뭉쳐낸 ‘악성조합’의 측면이다. 집단주의 문화나 개인주의 문화의 좋은 가치들은 다 내버리고 집단주의의 가장 나쁜 것들과 개인주의의 가장 나쁜 것들만 골라 선택 조합하고 결합시키는 것이 악성조합이다. 문화적으로 보면, 우리 사회에는 전통적 집단주의의 가치, 이데올로기, 지향들과 근대 개인주의적 문화 요소들이 아주 어지럽게 혼재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 혼재양상의 지배적 특성은 두 문화의 악성조합, 곧 문화의 타락상이다.
이 타락을 보여주는 크고 작은 사건들은 거의 매일, 하루에도 수백건씩 발생하고 있다. 최근의 가장 두드러진 사례가 전직 대학교수와 판사 사이에 벌어진 이른바 ‘석궁사건’이다. 사건의 발단 지점을 들여다보면 대학, 학회, 정부 부서, 사법 당국 등 우리 사회의 위세당당한 집단들이 집단주의 문화의 악성 요소와 개인주의 문화의 악성 요소들을 잘도 결합시키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집단주의가 악성의 개인주의와 결합하면 집단이기주의 혹은 ‘집단적 개인주의’가 된다. 개인주의가 악성의 집단주의와 결합하면 개인의 이익과 행복을 집단의 뒤에 숨어서, 집단의 이름으로 추구하는 ‘개인 집단주의’가 나온다. 이런 악성조합의 결과는 문화의 타락이다. 그 타락은 누가, 무엇이, 치유할 것인가? 지금 우리 사회는 이런 타락 앞에서 하루에도 열두 번은 더 울어야 할 이유를 갖고 있다.
[한겨레 2007-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