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호원의 목요칼럼>
진정한 용서는 사랑
참과 거짓을 구별할 줄 아는 眼目
안호원
news@pharmstoday.com
우리 신체 중 얼굴에 달려 있는 '눈(目)'은 세상 만물과 그 만물들이 이루는 어떤 현상이나 동작을 바로 볼 수 있는 기능을 갖고 있다.
또 눈을 뜨면 모든 것이 보이지만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어린아이까지도 다 아는 이 말을 하는 것은 일반적인 뜻의 눈이 아니라 사물을 바로 보고, 바로 느끼고, 바로 판단하고, 바로 인정하는 그런 류의 눈을 말하고 싶어서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나이가 들수록 눈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어린아이 때는 마음처럼 해맑은 눈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사물을 바로 보고, 평가하는 분별력이 떨어지는 것 같다.
나이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경험이나 안목이나 경륜이 붙어서 가치관을 바라보는 눈이 좀 더 밝아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하다. 마음에 욕심이 가득 차다보니 눈이 어두워지면서 사물을 바로 보고, 바로 평가를 할 줄 모르게 되는 것이다.
물건을 제대로 볼 줄 아는 눈을 갖지 못하다보면 손해를 보듯 제대로 볼 줄 아는 눈을 갖지 못하다보면 엄청난 손해를 가져올 수 있다.
그렇게 침침해진 눈을 갖고 있다보니 결국은 자기 자신까지도 모르게 된다. 결국 무엇 눈에는 무엇만 보인다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尺)로 사물과 사람을 재고, 평가하다 보니 참과 거짓을 구별할 줄도 모르며 사물이나 사람의 가치를 볼 줄도 모르게 된다.
그런 시각에서 무책임하게 던진 한마디의 말로 인해 상대는 물론 본인에게까지 큰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이다.
며칠 전 필자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모텔에서 그 어두워진 눈 덕분에 곤욕을 치르며 가슴아파한 적이 있었다. 물론 각계각층의 조직으로 이루어진 이 사회에서는 자신이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갖고 있더라도 다른 사람들과 일을 하다보면 불평 불만이 발생되고 때로는 오해도 받게 되는 것이 다반사다.
짧은 몇 날이었지만 '있는 그대로의 나(자아)'와 '가식적인 나'가 교차하며, 괴로움에 빠진 시간이 있었다. 불교의 경전인 법구경(法句經)에 "사랑하는 사람을 가지지 말라, 미운 사람도 가지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만나 괴롭고, 미운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는 법어(法語)가 있다.
이 법어에서처럼 우리 인간은 자연인으로서 사회라는 조직 속에서 만남의 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회인이기도 하다.
어떤 만남의 관계가 되느냐에 따라 사랑하며 그리워하는 사람, 미워서 보기조차 싫은 사람의 관계가 되어 괴로워하며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28년 전 알게된 젊은이와 모텔에서 주차와 잡일을 함께 하게 됐다. 10여년 연하이기에 동생처럼 생각하며 근 1년을 별탈없이 일해왔다.
그런 관계를 지속하던 우리가 며칠 전 낮 근무교대를 한 후 전혀 뜻밖의 상황이 벌어지면서 작은 틈새가 생기고 미묘해지는 관계가 되어 버렸다.
퇴근했던 젊은이가 사무실에 다시 들렀는데 마침 손님이 들어와 방키를 주었는데 방이 청소가 안되어 있다며 내려왔다.
이 소리를 들은 젊은이가 청소하는 아줌마에게 갔다 오더니 혼잣말로 "뭔가 계산이 안 맞아"하면서 인사도 없이 가버렸다. 순간적으로 이상한 예감이 들어 아줌마에게 가보니 청소했느냐고 묻기에 "한 것 같다"고 대답했는데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니 청소를 하다가 미처 정리를 못한 것 같다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내가 의심을 받는 것 같아 젊은이에게 전화를 했는데 우려대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줌마의 이야기를 다시 전해주어도 도무지 믿지 않는 눈치다. 한술 더 떠 "아줌마는 절대 그런 실수를 안 할 분"이란다. 그럼 나는 뭐가 되는가. 내가 낮 손님을 받아 방값을 슬쩍한 꼴이 되어 버렸다.
의심을 받게 된 것도 속상하고 화가 났지만 무엇보다도 28년을 알고 지내온 나보다 1년도 못되는 그 아줌마를 믿는다는 것이 나를 분노케하고 치를 떨게 만들었다. 아줌마 역시 해명을 해도 곧이 듣지 않으려 한다. 요지부동이다. 급기야는 아줌마가 그만두겠다고 까지 했다.
분노를 삭히면서 아줌마에게 나 한사람이 참으면 되니까 그만 둘 생각은 하지 말라고 했다. 또 그렇게 되면 완전히 사람까지 잃는다고 간곡히 설득했다. 그러나 그 젊은이에 대해서는 분노를 감출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다. 그야말로 흐려진 눈으로 사람을 잘못보고 잘못 잰 것이다.
속을 까뒤집어 보일 수도 없는 상황에서 명예훼손죄로 고발을 하고 싶을 만큼 치욕과 함께 배신감을 느꼈다. 잘못된 시각으로 판단하는 그의 버릇을 고쳐주기 위해서라도 수사를 의뢰할 생각까지도 가졌다.
다행히 나흘 후 전화를 통해 자신의 판단이 잘못됐다며 사과를 한다고 했다. 순간 마음이 누그러지면서 용서를 생각했다. 어쩜 내게 사치스러울 수도 있는 용서를 해주기로 했다.
일곱 번을 일흔번까지라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하면서 그를 용서키로 했다. 그 같은 용서는 자기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의 죄나 허물을 덮어주고 우리를 과거의 고통스러운 순간속에서 복수라는 연쇄반응의 고리를 벗겨내는 힘을 갖고 있다.
그리고 가해자와 피해자 쌍방이 새로운 만남을 시작하게 하며, 새로운 관계를 창조해내는 사랑의 힘을 제공하기도 한다. 특히 용서는 화해의 기회를 제공하고 화합으로 향하는 길을 가로막던 장애물을 제거하며 소외됐던 관계가 새로운 관계로 발전해 나가는 '의지의 기적'이 되기도 한다.
자신에게 잘못을 저지른 상대방을 가엾게 여기고 온유한 마음으로 인내하며 용서를 한다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용서하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거는 안다.
그래서 용서를 하는데 마음 한 구석 아픈 상처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아직도 수양이 덜 될 것 같고, 여전히 범인(凡人)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진정한 용서는 그를 포용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 그런 사랑 안에는 거짓도 없고, 악(惡)도 없고, 오직 아름다움만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