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일-‘한국의 오바마’는 어디에 있는가?


동문기고 도정일-‘한국의 오바마’는 어디에 있는가?

작성일 2007-05-02

[비판적상상력을위하여] ‘한국의 오바마’는 어디에 있는가?     

- 도정일(영문 61/13회)/경희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

빈부 양극화·고용 불안·불평등·공동체 붕괴…
한·미 양국 타락한 정치가 민주주의 위기 초래
차기 미 대통령감 오바마는 ‘대담한 희망’ 제안
현실은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그런 후보는…
 
미국 <시엔엔>(CNN) 방송이 정월 초하룻날 오사마 빈 라덴에 관한 방송을 내보내면서 ‘오사마’를 ‘오바마’로 잘못 표기하는 바람에 한 차례 소동이 벌여졌던 모양이다. 오바마는 미국의 차세대 대통령 감이라 해서 요즘 한참 인기가 치솟고 있는, 일리노이 출신의 민주당 초선 상원의원 바락 오바마의 성씨다. “오사마는 어디 있는가?”라고 했어야 할 자막이 “오바마는 어디 있는가?”로 찍혀 나왔으니 해프닝치고는 황당한 해프닝임에 틀림없다. 방송사는 그래픽 팀의 실수였다고 서둘러 사과했지만 오바마 지지자들은 그게 단순 실수가 아니라 벌써부터 이 흑인 정치인을 물 먹이려는 음모가 실수라는 허울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경우라며 분개한다.
사실은 오바마 자신도 자기 이름이 오사마와 너무도 가까운 연상거리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했던 적이 있다. 그가 상원의원으로 출마했을 때 사람들에게서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은 두 가지다. “어디서 그런 우스꽝스런 이름을 얻어왔나?” “보아하니 좋은 사람 같은데 왜 하필 더러운 정치에 뛰어들려고 하는가?” 좀 드문 이름이긴 하지만 오사마 빈 라덴의 뉴욕 테러 이전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던 ‘오바마’가 한 정치 지망생의 전도를 망칠지도 모를 불운의 이름이 된 것이다. “이제 와서 이름을 바꿀 수도 없고”라며 동정하는 친구들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오바마는 이름을 바꾸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아버지에게서, 아버지의 꿈과 함께 물려받은 소중한 유산이었기 때문이다. 요즘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어 있는 그의 최근 저서 <대담한 희망>에 나오는 이야기다.

오바마라는 미국 상원의원이 떴건 말건, 그가 무슨 책을 썼건 말건 그게 지금 우리와 무슨 상관인가 반문할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관계가 있다. 그가 사람들에게서 자주 받았다는 그 두 번째 질문(“보아하니 좋은 사람인 것 같은데 왜 하필 더러운 정치판에 뛰어들려고 하는가?”)은 오바마 개인에 대한 동정의 표명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정치라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깊은 실망, 허탈감, 분노, 냉소주의의 표현이다. 이런 실망과 냉소는 정확히 지금 여기, 대한민국 유권자들의 정서이기도 하다. 정치가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짙은 회의와 실망, 정치과정에 대한 불신, 정치행태에 대한 분노--이런 것들은 한미 두 나라 국민들이 공유하고 있는 정서다. 두 나라의 정치상황은 상당히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에 대한 국민의 실망과 허탈감이 공유되고 있다면 그 까닭은?

우선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하나는 민주정치 자체의 질적 하락과 타락이다. 미국은 민주주의 수출국임을 자처해온 나라고 한국은 이제 겨우 민주주의 비슷한 것을 해보기 위해 버둥거리고 있는 나라다. 한국 정치의 혼란은 민주주의의 ‘미성숙’에 기인하고 미국 정치의 혼탁은 민주주의 2백년의 역사 끝에 들이닥친 노쇠와 피로, 혹은 너무 익어서 썩기 시작한 과일과도 같은 ‘과성숙’ 때문인가? 정치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는 이제 그 효율의 한계점에 도달한 것인가? 어느 경우이건 간에 정치 불신과 냉소주의의 편만은 정치 타락에 기인하고, 이 타락은 민주주의의 위기다. 그것은 외부로부터의 위기가 아니라 민주주의 내부로부터의 위기다. 한미 두 나라는 기묘하게도 그 내적 위기를 공유하고 있다.

두 번째 이유는 국력의 상당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미 두 나라가 서로 비슷한 사회경제적 문제들과 서로 유사한 현실적 딜레마들을 안고 있다는 사실이다. 빈부 양극화, 높은 실업률, 고용불안, 범죄증가, 불평등, 공동체 붕괴, 물질주의, 국민 분열, 불안, 희망상실--현대 미국 사회가 안고 있는 이런 문제들은 거의 그대로 우리의 문제적 현실이기도 하다. 풀기 어렵고 해결책이 좀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그 문제들의 공통점이다. 말하자면 한미 두 나라는 풀기 어려운 사회경제적 난제들을 공유하고 있다. 문제의 이런 공유는 두 나라의 체제적 유사성에 기인한다.

마흔다섯 살의 오바마 상원의원이 미국 유권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는 그가 희망 없어 보이는 미국 정치에 어떤 희망의 비전과 메시지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희망을 말하기 어려운 시대에, 꿈이 멀리 멀리 도주해버린 듯한 곳에서 희망을 말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다. 그래서 그의 책 제목도 <대담한 희망>이다. 정치인치고 ‘희망’을 말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충분한 검토도 실현 방안도 없이 공허한 희망의 수사를 늘어놓고 지불보증도 없는 공수표를 남발한다는 점에서 흔히 정치인은 건달부족에 속한다. 오바마의 희망제안에도 그런 공허의 요소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 그런데도 그의 ‘새로운 정치’ 프로포잘이 사람들의 눈을 끄는 것은 그가 정직하고 겸허한 태도로 문제들 사이의 긴장을 정의하고 해결 방법들을 진지하게 모색하기 때문이다.

금년 대선을 앞둔 한국인들에게 오바마의 비전은 타산지석의 값어치가 있다. 그의 제안들 가운데는 주목할 만한 것들이 많다. 개인주의와 공동체 사이의 항구한 긴장은 어떻게 조절될 수 있는가, 온갖 이권과 이해관계의 대립이 사회를 찢어놓고 있을 때 개인의 자유와 집단의 삶을 화해시킬 방법은 무엇인가, 경제적 요청으로서의 경쟁과 사회적 요청으로서의 평등은 어떻게 조정되어야 하는가? 보수와 진보는 정치발전과 사회발전을 위해 어떻게 기여해야 하는가, 미국 정치가 당리당략과 진영 싸움을 넘어 민생의 문제를 해결해나갈 방법은 무엇인가? 국민 분열을 치유하고 공동운명체로서의 미국을 결속시킬 방법은? 그 결속을 위해 미국 정치는 모든 미국인이 동의할 공동의 가치들을 거듭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소중한 가치들은 무엇인가? 파탄지경의 미국 교육은 어떻게 수리해나갈 것인가? 아이들에게 책 읽어주는 일처럼 작아 보이면서도 사회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일들은 얼마든지 있다. 정치는 그런 일에 무관심하다. 그러나 정치는 작아 보이지만 의미 있는 일들에 주목해야 한다. 어떻게?

오바마가 던지는 이런 질문과 문제의식은 거의 그대로 우리 현실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우리 대선 판도에는 오바마 급의 비전과 제안을 가진 후보들이 눈에 잘 뜨이지 않는다. 아직 너무 일러서? 아직 너무 일러서, 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글쎄, 정말 그래서일까?
[한겨레 2007-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