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구-놀랍고 화나고 부끄러운 일


동문기고 장성구-놀랍고 화나고 부끄러운 일

작성일 2007-04-24

[전문가 시각―장성구] 놀랍고 화나고 부끄러운 일 

- 장성구 (의학 71/25회, 경희대 교수· 의학전문대학원) -
 
필자는 지난달 말에 국제학회 참석차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을 방문한 적이 있다. 학회도 학회려니와 초등학교 시절부터 익히 들어온 희망봉에서 인도양과 대서양의 위대한 조우를 볼 수 있다는 설렘은 나이가 들었어도 어쩔 수 없는 소박한 감정이었다.

세상에서 금과 다이아몬드가 가장 많이 난다는 요하네스버그에 도착하는 순간,이 나라가 2010년 월드컵 경기를 성공적으로 치르고도 남을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을 갖춘 나라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러한 생각은 케이프타운의 화려한 모습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깨끗한 대기,하늘 높이 치솟은 빌딩,잘 정돈된 도시,자색 빛 자카란다 꽃의 아름다운 가로수,흑백인을 막론한 유창한 영어 구사 능력 등 부럽다 못해 당장이라도 국제 사회에서 우리나라를 하염없이 따돌릴 수 있는 위기까지 느꼈다. 석유만 말고 무엇이든지 묻혀 있다는 지하자원을 생각하면 눈앞이 아찔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놀라움은 원주민인 흑인들의 참혹한 집단 거주지를 바라보는 순간 치솟아오르는 분노로 바뀌었다. 수천 채인지 수만 채인지 헤아릴 수 없이 다닥다닥 붙은 양철지붕의 단칸방 집들과,어지럽게 걸려 있는 빨래들을 바라보는 순간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싶었다.

먹고 사는 게 급선무인 이들에게 위생관념이란 찾아볼 수 없고,순박한 검은 눈동자에는 원한과 분노만이 느껴졌다. 아무리 정치적인 이유와 역사적인 인과관계에 따른 인종차별주의를 했더라도 이 천진한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인간적 사랑과 배려는 있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학술대회 참석이라는 미명 하에 수만리 길을 달려온 육신의 피곤함도 아주 포시라운 짓이고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어 심한 자괴감에 빠져버렸다.

이곳에는 꽃이 피지 않는 나무줄기를 타고 올라가 아주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붉은 꽃으로 장식해주는 부겐벨리아라는 꽃이 아주 많다. 이 화려한 꽃을 바라보는 순간 고목이 된 본래 나무는 마치 그 화려한 꽃나무가 자기 본래의 모습인 양 보여진다. 주인 목(木)은 없어지고 화려한 부겐벨리아만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이렇게 아름다운 꽃이지만 그 속에서 나는 다시 한번 좌절감과 부끄러움을 맛보아야만 했다.

남아공 정착 8년째라는 필자의 한국계 안내원의 말에 의하면 최근 들어 부쩍 늘어난 탈북자들의 남아공 밀입국으로 한달에 대여섯번 씩은 행정기관에 출두하여 통역해야 한다는 것이다. 살아보고자 사선의 두만강을 넘어 광활한 중국 땅을 헤매고,지구의 반 바퀴를 돌아 수만리 떨어진 이곳까지 와서 만신창이가 된 육신을 이끌고 살아야 하는 탈북 동포들을 생각하면 부끄럽고 안타까울 뿐이다.

눈을 감고 생각해보자. 여기가 어딘데 살기 위하여 여기까지 부평초 신세가 되어 떠밀려와야만 한단 말인가. 우리 민족끼리의 공조를 외치고,조건 없는 햇볕의 사랑이 맺은 결과가 이것이란 말인가. 인종차별정책으로 자기의 국민을 처참하게 만든 정부나,국민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해 자국의 국민들로하여금 세계의 유랑아가 되게 만든 정부나 다를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한 집단을 아직도 맹신하는 광신도들이 우리나라에 존재한다는 것 역시 부끄러운 일이다. 대한민국의 정체가 부겐벨리아 꽃인지,아니면 붉은 부겐벨리아로 장식된 고사목인지 모르겠다.

[국민일보 2006-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