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기고
도정일-한국 문학, 오르한 파묵에게 배워라
[비판적상상력을위하여] 한국 문학, 오르한 파묵에게 배워라
- 도정일 (영문61/ 13회, 경희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
금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오르한 파묵은 터키가 자랑할 만한 작가임에 틀림없지만 정작 터키 안에서는 그에 대한 정부와 대중의 시선이 곱지 않다. 그냥 곱지 않은 정도가 아니다. 터키 정부의 눈에 파묵은 ‘손 봐야 할’ 반국가 행위자다. 실제로 터키 정부는 ‘국가 정체성 모독’ 혐의를 씌워 파묵을 처벌할 수순을 밟아오고 있었고 작년 12월 그를 법정에 세울 계획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파묵이 곤경에서 벗어난 것은 재판 직전 검찰이 내린 기소중지처분 덕택이다. 검찰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은 세계 각국의 항의가 빗발쳤기 때문이다. 유럽연합 가입을 협상 중인 터키 정부로서는 파묵 재판을 강행할 경우 그것이 몰고 올 국제사회, 특히 유럽 쪽 비난여론의 ‘쓰나미’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던 듯하다.
이런 야단법석은 작년 2월 파묵이 스위스 한 잡지와의 회견에서 시도한 어떤 용감한 발언에 기인한다.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서 1백만 명의 아르메니아인과 30만 명의 쿠르드인이 터키 당국의 손에 학살당했다. 그런데 터키는 지금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고, 그 사건에 대한 공개 언급이나 토론도 금지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발언 내용이다. 오스만 터키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제국의 반대편에 섰다는 이유로 영내 아르메니아인들을 대거 이주시키고 그 과정에서 학살을 자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파묵에 의하면 ‘국제 학계의 상식’이 되어 있는 이 사건이 지금 터키에서는 입에 올릴 수조차 없는 금기사항이라는 것이다. 회견 내용이 알려지면서 파묵은 터키의 자칭 애국자들, 우파 보수언론, 국가주의자들의 집중 포화에 걸린다. 그의 책들은 길바닥에서 공개 화형을 당하고 보수신문들은 ‘파묵을 영원히 침묵’ 시켜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검찰은 그를 기소한다. 오스만 제국은 터키의 과거이고 유산이기 때문에 파묵의 발언은 터키 역사와 국가 정체성을 욕보인 행위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흥미로운 일이 하나 더 벌어진다. 금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되던 바로 그날 프랑스 하원이 새로운 법안 하나를 통과시키는데, 법안 내용인즉 1차 대전 때 “오스만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사건을 부정하는 행위는 형사범죄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이 법이 실시되면 누구든 프랑스 땅 안에서 아르메니아인 학살사건을 부정했다가는 감방에 갈 각오를 해야 한다. 터키의 애국 대중이 또 한 차례 흥분해서 프랑스를 맹렬히 비난하고 나왔을 것은 불문가지다. 프랑스 하원이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을 막고 터키를 길들이기 위해 그런 법안을 통과시켰다는 것이다.
재미난 것은 이 법안에 대한 파묵의 반응이다. 터키의 한 민간 텔레비전과의 회견에서 파묵은 그 법안이 프랑스가 지켜온 근본적인 원칙 가운데 하나인 ‘표현의 자유’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것이라 비판하고 나선다. “프랑스의 비판적 사유의 전통은 내게 깊은 영향을 주었고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이번 법안은 자유 아닌 금지이며 프랑스 전통이 지닌 자유 중시의 성격에 맞지 않다.” 또 그는 프랑스 법안에 분노하는 터키 국민들에 대해서도 자제할 것을 호소한다. “벼룩 한 마리 잡으려고 담요를 불태우지 맙시다.” 그는 내심 이 터키 속담을 문제의 그 프랑스 법안에도 적용하고 싶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프랑스에 대한 파묵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를 향한 터키 대중의 불쾌감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파묵과 프랑스가 사실은 터키 역사를 헐값에 팔아넘기기로 공모했고 그의 노벨상 수상도 터키를 욕보이기 위한 유럽의 정치적 결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파묵을 둘러싼 이런 소동을 보자면 비서구 출신의 작가로서 서구문명의 가치관과 전통으로부터 성장의 자양을 공급받아 비서구 지역 국민국가의 역사, 정서, 전통의 테두리 안에서 활동해야 하는 작가들이 겪어야 하는 비애와 역설, 딜레마와 곤궁이 있는 대로 다 드러난다. 그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는 그 ‘비판적 사유’나 그가 중시하는 ‘표현의 자유’는 미안하지만 터키의 전통이 아니다. 파묵이 프랑스적 자유의 전통이라 부른 것의 첫머리에는 볼테르, 디드로 같은 근대 계몽철학자들이 있다. 파묵을 키운 것은 오스만 제국의 영광이 아니라 “나는 당신과는 생각이 같지 않다. 그러나 당신의 말할 자유를 지켜주기 위해서라면 나는 내 목이라도 내놓을 용의가 있다”고 말한 볼테르적 전통이다.
터키 역사에 뿌리를 두지 않은 어떤 전통과 가치를 가져다 터키 땅에 접붙이면서 서로 다른 문명의 만남, 서로 다른 시간대의 융합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그 만남에서 오는 갈등, 충돌, 비애, 역설의 경험들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 파묵의 문학이다. 그를 법정에 세우고자 한 조국 터키에서 그가 경험하는 것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주제, 곧 근대와 전근대, 서구와 비서구적인 것 사이의 길항이고 충돌이다. 그런 충돌의 경험에서 작가가 주목할 것은 어느 것이 더 나으냐 못하냐의 문제이기보다는 서로 다른 전통들 사이의 융합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역설과 딜레마라는 문제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주제라고 말했지만 우리 문학은 이런 주제를, 혹은 그런 문제의식을 배경에 깐 현재적 삶의 경험을 때깔나게 다루어보지도 못한 채 지금 이상한 겉멋에 취해 비틀거리고 있다. “나의 발언을 국가적 수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국가의 역사에 찍힌 오점을 말하는 것이 수치인가 아니면 말하지 못하게 재갈 물리는 것이 수치인가?” 파묵의 이런 질문은 터키에만 해당되는 것인가? 천만의 말씀, 그것은 21세기 한국을 향한 것이기도 하고 일본, 중국, 북한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노벨상 수상자 오에 겐자부로 역시 일본 역사의 오점을 말했다가 곤욕을 치룬 아시아 작가의 하나다. 벼룩 한 마리, 아니 빈대 한 마리 잡으려고 초가삼간 불태우는 짓을 우리는 좀 많이 해왔던가? 문학은 권력의, 눈먼 애국주의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양심’이다. 표현의 자유가 소중한 것은 그게 어디 특산물이어서가 아니라 양심 그 자체의 소중함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도 역설과 비애는 있다. 표현의 자유조차도 양심을 떠나 추악하게 타락할 수 있으므로.
[한겨레 2006-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