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일-김정일의 잠 못드는 ‘거세공포’


동문기고 도정일-김정일의 잠 못드는 ‘거세공포’

작성일 2007-03-30

< 김정일의 잠 못드는 ‘거세공포’>

- 도정일 (영문61/ 13회, 모교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인간이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동물이라 생각한 것은 애덤 스미스 이후의 고전경제학적 사유 전통이 오랫동안 고수했던 ‘인간관’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인간 행동의 합리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경제행위다. 흥부네 가게에서는 넥타이 한 장이 만원인데 놀부네 가게에서는 같은 물건을 2만원에 판다고 할 때, 제 정신 가진 사람이라면 아무도 놀부네로 가지 않는다. 이때의 ‘제 정신’이 손익득실을 따질 줄 아는 능력, 말하자면 합리성이다. 손익을 따져 손해 볼 짓은 결코 하지 않는 것이 인간이며, 경제행위는 인간의 이런 행위 동기와 행동방식을 웅변하는 합리성의 패러다임이라고 그 경제 합리주의의 인간관은 말한다.

불행히도 이 인간관은 맞지 않다. 아니, 아주 맞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인간 행동과 행위동기의 절반쯤을 설명해준다면 절반쯤은 설명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설명되지 않는 다른 절반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현대 경제학의 ‘깨침’이다. 풍문으로 듣자면, 지난 몇 년 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사람들의 학문적 기여 가운데 상당수는 바로 그 설명되지 않는 ‘이상한 절반’에 관한 것이다. 그 이상한 절반은 말할 것도 없이 경제 합리주의로는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인간행동의 비합리적 복잡성이라는 부분이다. 그 복잡성에 주목하기 위해 현대 경제학은 심리학, 정신분석, 인류학 같은 다분히 ‘인문학적’인 인간 통찰의 방식들을 열심히 참조한다. 학제간 연구, 혹은 통합학문적 접근법이 시도되고 있는 셈이다.

인간의 행동이 합리주의의 밝은 햇살 아래에서 깨끗이 설명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그의 행위 동기가 많은 경우 어둡고 깊고 컴컴한 곳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감추어짐은 행위자의 의식적인 감춤일 때도 있지만 행위자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그러므로 행위자 그 자신도 모르는 ‘무의식적인’ 것일 경우가 더 많다. 지금은 사방에서 공격을 받고 있지만, 프로이트가 인간 이해에 기여한 것은 그의 정신분석학이 바로 그 무의식이라는 이름의 깊고 어둔 동굴을 탐색한 데 있다. 그 동굴 안에는 이름 붙일 수 없는 괴물들이 우글거리고 있다. 인간 행동을 지배하는 것은 그 괴물들이다. 그 동굴은 인간의 가슴 속에 있지만 그것의 존재를, 그리고 그 안에 서식하는 괴물들의 이름을 모른다는 점에서 인간은 누구도 자기 자신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또 그 괴물들 가운데 어느 녀석이 언제 어떻게 치밀고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행위자 자신도 그가 왜 특정의 방식으로 행동하는지 스스로 알지 못하고 스스로 설명하지 못한다.

이렇게 말하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결국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는, 혹은 설명하기를 포기하는 절망의 카운슬링 같이 들린다. 프로이트 자신이 정신분석을 ‘불가능한 사업’이라 말한 것은 그런 절망을 그 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을 고백하기 위해 학문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학문이 학문이기 위해서는 비록 실패하고 엎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어떤 설명 방식을 내놓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게 모든 학문의 운명이다. 그 엎어질 것을 각오하고 프로이트가 내놓은 설명법의 하나가, 지금 내 방식대로 이름을 붙이자면, ‘불안 기원론’이다. 또 내 방식대로 풀어서 말하면, 인간 행동을 지배하는 것은 ‘불안’이며 그 불안의 기원은 ‘거세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것이 그 불안기원론의 골자다. 인간이 특정의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어떤 불안 때문이며, 그 불안의 뿌리는 거세공포라는 설명이다.

나는 지금 어설프게 프로이트를 팔기 위해 ‘거세공포’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10월 9일의 북한 핵실험을 놓고 나라 안팎이 시끄럽다. 사람들을 궁금하게 하는 것은, 그리고 정치 해설자들이 열심히 풀어내고자 하는 것은 북한이 왜 핵실험을 했는가의 그 ‘왜’에 관한 것이다. 대미협상용이다, 체제위협에 맞서기 위해서다, 허풍이고 과장이다 등등의 설명들이 난무하고 있다. 그런 설명의 목적은 북한 또는 김정일의 돌출행동과 그 동기를 제대로 잡아내보자는 것이다. 나는 정치해설자가 아니고 정치학 전공자도 아니며 시사평론을 하는 사람도 아니다. 버나드 쇼 식으로 말하면 나는 굴뚝에 대해서는 좀 아는 것이 있어도 정치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 굴뚝? 사실은, 굴뚝에 시꺼먼 검정이 낀다는 것 말고는 굴뚝에 대해서도 내가 잘 안다고 말할 수 없다. 내가 아는 것은 정치와 굴뚝이 참 비슷한 데가 있구나 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북한 핵실험은 정치 문외한도 그냥 문외한으로 남아 있기 어렵게 한다.

‘인간은 합리적 동물이다’는 절반의 설명

깊고 컴컴한 곳의 무의식 언제 치밀고 나올지 몰라

인문학 서생이 보기에 그의 두려움은 ‘가문’ 종언

북의 깊은 불안에 대해 우리는 무얼 할 수 있는가

정치 문외한인 나 같은 인문학 서생까지도 참으로 궁금하게 하는 것은 김정일의 행위 동기라는 부분이다. 누구 말을 인용하면 그는 ‘위험한 불장난’을 하고 있다. 불장난이란 어릴 때 하는 것인데 김정일은 어릴 적 불장난의 매혹을 아직 잊지 못한 건가? 그러나 어른이 불장난을 한다면 그건 그냥 장난이 아니다. 그래서 말인데, 그 ‘왜?’에 대한 해설자들의 분분한 설명들을 듣다보면 그들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 하나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인문쟁이 서생의 눈으로 보자면 김정일에게는 잠 못 이루게 하는 한 가지 깊고 깊은 불안이 있고 그 불안의 뿌리는 거세공포이다. ‘체제위협에 맞서려는 행동’이라는 해설은 그 불안의 일단을 상식선에서 설명해주고 있는 듯하지만 중요한 것은 김정일을 잠 못 이루게 하는 거세공포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라는 문제다. 그의 거세공포는 그 기원이 바깥에 있다기보다는 ‘안’에 있다. 그를 두렵게 하는 것은 외부로부터의 위협이기보다는 북한 체제의 ‘내부 붕괴’다. 그 붕괴가 가져올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김정일 가문통치의 종언, 곧 그의 거세다.

문제를 참으로 어렵게 하는 것은 미국의 대북한 강경노선이 유지되거나 강화되면 될수록, 국제사회의 대북 압박이 커지면 커질수록 김정일 권력체제가 돌발적으로 행동할 가능성은 더 높아진다는 것이다. 내적 위협을 덮고 잠재우는 데는 그런 행동 이상의 유효한 방법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김정일의 거세공포와 그 공포로부터 야기되는 깊은 불안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것이 백면서생의 눈에는 지금 우리 정치가 대면한 난제 중의 난제일 듯싶다.

== 한겨레 2006-1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