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기고
도정일 - "행복=소유÷욕망" 인가
[비판적상상력을위하여] (행복=소유÷욕망)인가
도정일 (영문61/ 13회, 경희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소문 통신에 따르면 ‘행복사냥’이 요즘 세계 몇몇 나라에서 대중적 유행이 되어 있다 한다. 영국에서는 행복론 계열의 책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와 사람들을 행복의 나라로 안내해주고 있고 (내 귀에 들려온 책 제목만도 대여섯 종은 된다) 여당 야당 할 것 없이 정치권이 부쩍 ‘행복의 정치학’이라는 것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소식이다. 미국에서는 ‘행복학’ 강의가 대학의 인기 과목으로 올라섰다는 소문도 들린다. 우리도 그 몇몇 나라에 낀다. ‘웰빙’이라는 말은 업계가 수입한 지 몇 해만에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에게는 ‘팥빙수’보다 더 친근한 말이 되어 있다. ‘행복해지는 법’을 가르쳐주겠다고 공언하는 책들도 여럿 나와 있다.
영미 두 나라가 행복에 관심이 많은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말로 ‘행복’을 사회적 화두가 되게 한 것은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이다. 미국의 경우, 폴 새뮤얼슨이 쓴 인기 경제학 교과서가 ‘행복의 공식’이란 걸 들고 나와 대학 학부생들을 유혹하기 시작한 것은 벌써 20년도 더 된 일이다. 무엇보다도 두 나라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자유무역, 세계화, 신자유주의의 선도국이다. 자본주의 선도국들은 행복을 강조할 필요와 의무가 있다. 자본주의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준다면 그걸 자랑하기 위해서도 “봐라, 우리는 행복하다”고 떠들 필요가 있고, 자본주의가 약속과 달리 사람들을 비참하게 한다면 그 비참을 덮고 가리기 위해서, 그리고 그 비참에 비례해서, 행복해지는 법(“불행은 네 탓이야”)의 개인적 터득 기술을 열심히 사람들에게 가르쳐주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뭔가?
21세기 초 도시 중산층 이상의 한국인을 지배하는 정신 상태는 두 개의 강력한 ‘코드’에 관통 당해 있다. 더 날씬한 은유가 생각나지 않아 좀 투박하게 대놓고 말하자면, 하나는 ‘탐욕의 코드’이고 또 하나는 ‘선망의 코드’다. 탐욕의 코드는 폴 새뮤얼슨이 말한 자본주의적 ‘행복의 공식’을 따른다. 이 경제학자가 내놓은 계산법에 의하면 행복(H)은 욕망(D) 분의 소유(P)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얼마만큼 소유했는가가 나의 행복을 결정한다. 내가 100을 원하는데 100을 가지고 있으면 나는 완벽하게 행복하다. 그러나 100을 원하는데 가진 것은 20 뿐이라면 내 행복은 완전치의 1/5에 불과하다. 이 경우 나는 겨우 20 퍼센트만 행복하고 80 퍼센트는 불행하다. 그러므로 소유하라, 친구여, 욕망의 크기만큼 소유하고 그 소유를 달성하기 위해 뛰어라, 그러지 않으면 너는 불행을 벗어날 길이 없다. 네가 뛰어야 네 부동산도 뛴다.
선망의 코드는 “저 자는 갖고 있는데 나는 없어, 이건 안 되지, 암 안 될 일이고 말고”라고 사람들을 들쑤셔 견딜 수 없게 만드는 전염성 질투의 부호다. 저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은 나도 가져야 한다. 내가 저 인간만큼 갖지 못한다면 나는 불행하다. 내가 가질 행복을 저 자가 갖고 있네 그랴? 저런 도둑놈, 내 행복을 훔쳐가다니. 화가 치미는 바로 그 순간에 질투의 여신이 나타나 행복에 이르는 길을 확인시켜 준다. 저 자가 가진 것은 너도 가져라, 훔쳐서라도. 그러면 행복은 네 것이다. 아니, 너는 저 자가 가진 것 이상으로 가져야 해. 저 녀석이 100을 가졌다고? 그러면 너는 200을 가져, 300이면 더 좋고.
탐욕과 선망의 부호가 행복의 공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려준 것은 석가모니다. 욕망의 크기는 무한해서 그것을 충족시킬 방도가 없다는 것, 그것을 알게 된 것이 붓다의 ‘깨침’ 가운데 하나다. 욕망은 일정량의 크기로 묶이지 않는다. 100을 바라던 욕망은 그 100을 소유하는 순간 200으로 불어나고, 200을 갖는 순간 300으로 커져 달아난다. 욕망의 크기를 정할 수 없기 때문에 소유를 키우는 방법으로 행복에 도달한다는 것은 신기루 잡기다. 그러므로 욕망의 크기를 줄여라. 그것만이 평온에 이르는 길이다. 욕망이 제로일 때는 제로의 소유만으로도 너는 행복하다. 재갈 물리지 않은 욕망이 탐욕이다. 그 탐욕이 충족되지 않아 너를 화나게 하고 질투하게 하는 것이 ‘진’(분노)이며 이 간단한 진리를 모르는 것이 ‘치’(어리석음)다. 그러므로 욕망을 다스려라, 줄여라, 끊어라, 그리고 평화로워라, 친구여.
그러나 자본주의적 행복의 공식이 행복은커녕 불행, 불안, 불만의 기원이라면, 석존의 평화 공식만으로 이 지상에 살 수 있는 사람도 히말라야의 도인 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것 역시 인간 세계는 안다. 욕망을 제로 지점에 두는 것이 ‘니르바나’라면, 욕망이 제로 포인트로 돌아가는 그 열반은 죽음의 순간에만 가능하다. 생물학의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생명체의 목표가 아니다. 사회적 관점에서도 그러하다. 모두 죽어서 니르바나에 들자라고 주장하는 ‘열반당’이 정치의 세계에 뜰 수 있는 가능성은 그야말로 제로다. 욕망이 아니라면 인간 세계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 생존에 필요한 욕망과 과잉의 탐욕은 서로 성질이 다르다. 그러나 석존의, 혹은 동양적 정신세계의 가르침은 현대인의 불행감을 다스리는 데 너무도 중요하고 요긴하다. 사람들의 탐욕과 선망을 부추기지 않고서는 단 하루도 지탱되지 않는다는 것이 현대 경제의 치명적 결함이며 현대인의 삶을 괴롭히는 딜레마다. 이 결함을 치유하고 딜레마를 풀 방법이 있을까? 동양 문화권에 속한다면서 동양의 정신적 가치는 시궁창에 던지고 탐욕과 선망의 코드에 나포되어 있는 것이 지금 우리 사회다. 그러나 그 치명적 결함을 고쳐 나가야 하는 것이 현대 문명의 과제이자 우리 사회의 과제다.
고통과 불행은 그 자체로는 결코 예찬할 것이 못된다. 많은 경우 그것은 무의미하고 잔인하다. 그러나 삶이 고통과 불행을 수반한다는 것 역시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인간세계의 현실이다. 만약 행복의 추구가 불행의 완벽한 제거와 고통의 회피에 목표를 둔다면 그 목표는 달성 불가능할 뿐 아니라 그 목표 자체가 고통의 기원이 된다. 완벽한 행복의 추구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이미 삶의 진실이 아니며, 영국 심리학자 애덤 필립스의 주장처럼 인간 사회의 도덕적 이상도 아니다.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법을 열심히 찾아 헤매야 하는 사회는 행복한 사회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절망의 사회다.
- 한겨레 2006년 7월 28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