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기고
최혜실 - 새로운 인구구성에 맞는 도덕관을 정립하자
새로운 인구구성에 맞는 도덕관을 정립하자
-- 최혜실 (경희대 국문과 교수) --
기가 막힌 TV 광고를 본 적이 있다. 다리를 다친 청년이 지하철의 비어있는 노약자 보호석에 앉지 않고 미소 짓고 있는 이야기였다. 그곳은 ‘노약자’, 즉 노인과 약자의 보호석이다. 다리를 다쳤으니 당연히 앉을 권리를 지닌 청년이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불이익을 웃으면서 감당하는 모습이었다.
그 광고를 본 나의 심정은 거의 ‘이조여인잔혹사’를 본 시청자의 심정이었다. 정혼한 망인(亡人)을 위해 수절하다 자결한 열녀의 이야기처럼 그 광고는 정말 참혹하고 비인간적이었다. 예순이 넘어 백발이 성성해도 등산을 다닐 만큼 건강한 노인을 위해 무거운 책가방을 맨 수험생이 자리를 양보해주어야 할 것인가?
항상 상황에는 융통성이라는 것이 있는 법, 한국인의 그 지긋지긋한 이중 잣대에는 정말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현실은 그렇지 않지 않은가? 교단에서 교사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노인이 아들의 매질을 견디다 못해 자살을 하고 있다. 멀쩡한 부부가 자기 아이를 구타하여 숨지게 하는 세상이다. 반면 사회에 통용되는 경로사상, 부모 사랑은 조선시대 유교적 윤리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있다.
이중 잣대 때문에 사람들은 이중의 심성을 지니게 되었다. 표면적으로는 지금까지의 도덕의 잣대를 충실히 지킨다. 부모는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을 의당 지녀야 한다고 모든 사람이 표면적으로 외친다. 경로석까지 만들 정도로 효(孝)를 숭상하는 나라라고 자랑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사람들은 이 끔찍한 인간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냉정한 손익계산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우선 만혼(晩婚)이 성행한다. 그리고 출산율이 낮아진다. 심지어 의도적으로 아이를 낳지 않는 부부까지 늘고 있다. 시부모를 모시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결혼하는 여성이 늘고 있다.
내가 60세 이상의 노인이 될 때 이 사회는 초고령 사회에 진입한다고 한다. 청년 하나가 네 명의 노인을 부양해야 하는 사회라는 것이다. 이제 사회 현실과 제도, 도덕을 일치시킬 때가 왔다. 나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일하고 싶고 사회인들과 어울리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인이라서 받는 특별대접이 없어야 젊은 사람들이 그나마 내게 접근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호봉제 대신 임금 피크제를 도입하여 아무래도 허약한 노인의 신체적 조건을 감안한 적은 임금으로도 만족해야 한다. 물론 지금은 아니겠지만 노인 수와 젊은이 수가 비슷해질 때 경로석 따위는 폐지해야 하리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지금과 같은 양육비, 사교육비로 누가 자기 아이를 키울 수 있겠는가? 손발이 다 닳도록 자식 생각에 그 곱던 이마 위에 주름이 가득해야 진정 부모라면 그 역할 안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무얼 해줄 수 있느냐”고 묻기 전에 자식이 부모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물을 수 있는 사람이 미래의 자식상이 될 것이다.
유교사회의 도덕률은 노인 인구가 극히 적고 유소년이 많은 삿갓형 인구 비율에 적합한 가치관이다. 이제 항아리형(型) 인구 비율에 맞는 새로운 도덕관을 정립할 때가 왔다. 남은 문제는 사회보장제도가 해결하도록 하자. 어린이, 젊은이, 노인이 조금씩 양보하여 해법을 찾아야 할 시점이 왔다.
- 주간조선 2006년 6월 21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