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특별강좌
인도기행(4)
<인도의 국부(國父) 간디의 혼을 찾아서>
이윤희 (사학21·문학박사·서일전문대교수)
마하트마 간디는 서부 인도 구자라트 주에서 태어났지만 봄베이에서 오래 살았다. 봄베이에 있는 간디의 기념관은 두번째 인도를 방문했을 때 찾아가 보았다. 찾아간 바로 그날이 간디가 피살된지 47주기 제사날 이어서 향불을 피워놓고 경건하게 추모하고 있었다.
기념관은 크지않는 3층의 아담한 건물로 1층은 간디에 관련된 세계 각국에서 출판된 서적·팜플렛등이 비치 되어있고 기념품을 판매하기도 하고 간소한 사무실도 있었다. 삐걱거리는 좁은 나무계단을 따라 올라간 2층엔 20세기 최고의 인물이라고도 일컬어지는 간디의 많은 사진이 진열되어 있어서 그의 위대한 생애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나는 간디하면 으례히 떠오르는 것은 그의 깡마른 모습이었는데 간디가 아프리카 전쟁(보어전쟁)에 참여했을 때 사진은 스마트한 외모를 지닌 청년 간디의 모습이었다.
특별히 인상적인 사진은 간디가 1893년 처음 남아프리카에 갈때 인종차별을 받은 장면으로 영국 철도관리들이 그의 가방을 내팽개친 장면의 사진이었다. 그는 1등 좌석표를 갖고 있었는데도 유색인종 이라는 이유 때문에 쫓겨났고 여기서 그는 그 자신 생의 전환이 일어났다고 「자서전」에 기록하고 있다.
영국에서 변호사 수업을 마치고 귀국하여 개업을 한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남아프리카(나탈)에 정착한 인도인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1년 계약으로 그곳에 갔던 간디는 동족의 비참한 인종차별을 외면할 수 없어서 20년이 넘도록 그곳에 머물고 말았다. 그곳에서 몸소 경험하고 터득한 성공적인 비폭력 운동이 그의 사티아그라하 운동(진리추구운동)이었다.
사티아그라하는 비폭력의 수단에 의해 <전쟁>을 수행하는 방법이었다. 전쟁에서는 난폭한 방법으로 적을 굴복시키려고 하지만 사티아그라하에서는 쌍방이 정의와 공명정대함에 입각하여 합의된 해결책에 도달하는 것이 기대된다. 여기에서는 공동으로 목표를 달성하려는 것이므로 승리도 또한 패배도 없는 것이다. 간디는 겁쟁이가 비폭력이라는 이름아래 피난처를 구하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비폭력은 투쟁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며 때로는 호전적이기도 하다. 사티아그라하의 목적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제도에 협조하지 않는 것이다.
사티아그라하에서 파생된 것이 비폭력 비협조였다. 그것은 <외로운 사랑의 표현>이었다. 간디는 <비협조가 시티아그라하 병기고(兵器庫)에 있는 가장 중요한 무기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다만 진실과 정의에 입각하여 꾸준히 적의 협조를 구하려는 수단이라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된다>라고 말하였다. 비협조는 적이 자신의 폭력을 치유했을 때는 언제나 협조하겠다는 자세이다. 비폭력 비협조의 목표는 쌍방이 투쟁하는 동안에 상대편의 견해를 존중하는 태도를 배워 이에 따르는 동의(同意)였다. 개화되고 지성적인 여론은 사티아그라하에서 추구하는 가장 힘있는 병기가 될 수 있었다.
마하트마 간디가 단행한 1930년 시민불복종 운동은 이전의 운동보다 훨씬 적극적이었다. 10년 전의 비협조 운동이 무저항적 운동이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시민불복종 운동은 적극적인 반항 운동이었다. 전자는 행정부에 협조하지 않음으로써 곤경에 처하도록 하려는 것이었으나, 후자는 대규모의 특별한 불법 행위를 감행함으로써 영국의 지배 체제를 마비 시키려는 것이었다.
마하트마 간디는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모든 국민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불만이 많은 염세(鹽稅)에 대항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소금은 말할 것도 없이 모든 인도인이 필요로 하는 생활 필수품이었다. 그러나 소금은 많은 세금이 부과되는 국가의 전매품이었으므로 어느 누구도 소금을 제조하거나 파는 것은 불법 행위였다. 해안 지방의 농어민들이 천연소금을 채취하여 사용하여도 구속되었다.
61세의 간디가 25일에 걸쳐 약 천리길을 도보로 행진할 때 간디가 이끄는 행렬은 많은 사람들에게 마치 모세가 유태민족을 이끌고 출애굽을 감행하는 모습을 연상케 하였다. 수많은 군중이 뒤따랐고 연도에 인파가 운집하여 그의 행진을 환영하였다. 주변의 마을 사람들이 몰려 나와 길 위에 꽃을 뿌리고 간디 앞에 무릎을 꿇었다. 황제도 부러워할만한 경의와 갈채를 받은 간디의 행진을 신물들은 연일 보도 하였으며 그 소식은 세계로 전송(電送)되어 나갔다.
인도의 자유주의자들과 상당수의 모슬렘이 냉담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으나 간디의 소금 행진은 인도 일반 남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간디는 자신이 소금법(法)을 위반한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 모든 인도인에게 소금을 만들거나 천연소금을 채취하는 데 협조하도록 호소하였다.
간디의 태도는 사실상 총독정부에 대한 공식적인 전쟁 선포를 의미하였다. 간디의 행동은 대규모적인 민중운동의 신호였으며 수천 명의 인도인들이 간디의 충고에 따라 법을 어기면서 소금을 채취하였다. 인도 전체가 심각한 소용돌이 속에 휘말렸으며 간디의 추종자들과 정부군 사이에 유혈 충돌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총독정부도 강경 진압책으로 맞섰다. 간디를 비롯하여 국민회의 운영위원회 전원이 구속되었다. 간디의 구금 소식은 인도인들의 격렬한 저항과 파업으로 몰고갔다. 그 유명한 소금행진 사진도 금방 눈에 띠었다.
1931년 영국과의 원탁회담 때 나타난 간디의 모습은 전 세계에 중계방송 되었다. 어윈 총독과 간디 사이에 회담이 델리의 총독 관저에서 열렸다. 위엄있고 화려한 차림의 총독과 반나(半裸)의 수도승이 대등하게 나란히 걷고 있는 사진을 보는 것은 인도 국민에게는 통쾌한 장면이었고 영국인에게는 메스껍게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간디의 지극히 인도인다운 그 모습이 오히려 인도인들의 자존심을 살리고 영국인들의 자존심을 꺾었다. 사실 간디는 세계 제일의 위치를 자랑했던 인도의 면직물 산업이 영국 제국주의 정책에 의해 무참히 파멸 되었다는 사실, 그로 인한 인도인들의 헐벗고 가난한 모습을 세계에 보여주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간디의 신념어린 태도에서 무엇이 진정으로 국가와 국민의 자존심을 살리는 길인가를 발견해야 한다.
3층엔 간디가 사용했던 물레와 조그만 책상이 눈길을 끌었다. 물레는 인도 국민운동의 상징이었고 조그만 책상은 옛날 우리나라 선비들이 사용했던 것과 비슷하였다.
그밖에 간디가 조국 인도를 위해 일했던 중요한 사건들을 밀랍인형으로 풍부하게 재현시켜 놓고 있어서 외관보다는 내용이 알찬 이 기념관은 인도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느껴졌다.
나는 간디의 기념관을 관람하고 나니 간디의 생애가 저절로 스쳐 지나갔다.
천재적인 투쟁전략과 굽힐 줄 모르는 투쟁활동을 전개한 간디의 인기는 그의 개인 생활의 금욕주의적 소박함에 있었으며 가난하고 교육 받지 못한 사람들의 정서를 붙잡는 그의 능력은 비범하였다. 간디가 보여준 가난한 인도의 옷차림과 항상 3등실 기차 여행을 하면서 서민들과 광범하게 접촉하는 소박한 모습이 하층민에게 격의없는 친금감을 주었다.
억압받고 생활고에 시달려온 서민들은 마하트마 간디를 모든 고통과 기아로부터 그들을 구해줄 수 있는 위대한 해방자로 바라보았다. 지식인들도 우려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지금까지의 무기력한 독립운동에 활력소를 불어 넣어줄 수 있는 인물이라는 기대에서 간디를 지지하고 나섰던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의 독립을 외치면서 그의 이념은 인도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세계를 위한 것이라고 거듭 강조하였다. 사실 인도의 독립보다는 오히려 남아프리카에서 체득해온 비폭력 비협조운동을 세계에 과시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세계 제2차대전이 격화되어 영국이 동남아시아 전쟁터에서 곤경에 처했을 때 무리하게 인도 철퇴요구운동을 추진했던 것도 그에게는 10년만에 찾아온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비폭력운동은 인도 국민 뿐만아니라 전세계 인류에게 전파해야 할 하나의 <종교>가 되어야 했다. 당장 독립이 이룩되면 인도는 일본 세력을 구축(驅逐)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영국 세력이 철수한 후 영국의 군사적 지원없이 인도 단독으로 일본을 물리친다는 것은 설득력이 결여된 주장이었다. 사실 그는 일본세력의 축출보다는 그의 이념을 전파하여 위대한 <간디제국>을 수립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였는지도 모른다.
국가와 민족을 구한 간디의 묘(墓)는 라지가트라고 불리는 곳으로 델리성 밖 자므나 강 기슭에 있었다.
입구에서도 상당한 거리를 걸어 들어가니 간디의 묘는 그의 세계적 명성에 비하면 초라할 정도로 검소해 보였다. 인도 최고의 걸작품, 우아하고 아름다운 동양 제일의 보물, 세계에서도 뛰어난 보배의 하나인 타지마할을 만들어 낸 인도이건만, 아마도 인도의 국부(國父)인 간디의 생전의 삶 그 자체를 영원히 기리기라도 하듯 치장이나 위용이라곤 없이 검소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사실 간디는 힌두의 대표적인 장례의식에 따라 화장되어 그의 유골은 갠지스 강에 뿌려졌으므로 내가 경건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무덤은 정확하게 말하면 그의 가묘(假墓)일 뿐이다.
20세기 최대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 묘는 참배객들이 끊이지 않아 간디의 생활철학이고 독립운동에 있어서 운동철학이었던 그의 사티아그라하운동이 영국 지배자들을 굴복시키는데 끝나지 않고 오늘도 인도 국민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듯이 보였다. 나도 그 <영원의 불꽃>이 타오르는 간디의 묘 앞에 헌화하고 묵념하였다.
다음으로 자와할랄 네루 묘를 찾아가 보았다. 그곳은 인도에서 가끔 볼 수 있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아름다운 정원을 연상할 만큼 넓게 자리잡고 있었다. 네루 묘는 깔끔하게 관리되고 유난히 근사하게 장식해 놓았는데 후손이 집권했기 때문일까? 그러나 참배객은 간디의 묘에 비해서 눈에 띠게 적은 숫자였다.
두 사람 모두 인도 독립운동과 조국의 발전에 전 생애를 바쳤지만 그러면서도 간디와 네루의 비중은 참배객의 숫자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렇게 차이가 큰 것인가!
간디는 위대한 인물이었고 20세기 최대의 성자로 칭송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도 노벨평화상을 간디가 수상하지 못했다는 것이 노벨평화상 선정의 공정성에 의구심을 갖게한다. 20세기 통틀어 한 사람의 노벨평화상 수상자를 결정한다면 아마도 마땅히 간디에게 주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그에게 주어지지 않는 이유는 영국에 맞서 전 인도 국민들을 이끌고 대대적인 독립운동을 간디가 전개했기 때문에 영국의 입김이 작용하지 않았겠는가?
뽑는글 : 간디 묘(墓)는 참배객들이 끊이지 않아 간디의 생활철학이고 독립운동에 있어서 운동철학이었던 그의 사티아그라하운동이 영국 지배자들을 굴복시키는데 끝나지 않고 오늘도 인도 국민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듯이 보였다.
- 103호 (1997년 3월) 개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