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광-SNS의 폭발력


동문특별강좌 이택광-SNS의 폭발력

작성일 2012-01-27
▲이택광(모교 외국어대학 교수)

한때 기피 대상이었던 진보나 좌파라는 표현이 인기를 끌고, 정치에 대한 관심이 교양의 일부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보수였던 이들이 중도로 정치색을 바꾸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이렇게 된 원인으로 많은 이들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존재를 꼽는다. 틀린 지적은 아니다. 정보의 민주화라는 측면에서 새로운 매체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SNS는 현실의 일부이지 현실 자체는 아니다. 분명히 현실에 효과를 미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SNS가 현실을 대체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현실은 SNS보다 더 복잡하다. 이렇게 한계를 가진 SNS가 어떻게 현실을 바꿀 수 있을까? 그 까닭은 사회적 역학관계에서 SNS의 원리가 큰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여론이라는 것은 모든 의견의 총량을 의미하지 않는다. 언제나 주도적인 입장이 여론을 장악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SNS는 소수의 의견일지라도 공감과 지지를 획득해가는 방식으로 다수의 여론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한다. 이런 원리는 지금까지 존재했던 여론형성의 과정과 크게 다른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차이가 있다면, SNS 특유의 폭발력일 것이다. 이 폭발력이 SNS 바깥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SNS에서 논의된 이슈를 사회 의제로 설정하게 만든다고 볼 수 있다. 그럼 왜 굳이 SNS가 이런 역할을 하는가 물어볼 수 있겠는데, 이것은 보수우파의 공적이라고 해야 하겠다.

선진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을 국가발전의 제일목표로 삼은 까닭에 한국에서는 너도 나도 새로운 기술이나 기기를 통해 자기 자신의 ‘선진성’을 뽐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스마트폰은 젊음의 상징이고, SNS와 관련한 최신용어에 적응하지 못하면 시대에 뒤떨어지는 세대처럼 보인다. 미국의 영향도 컸다. 오바마를 비롯한 저명인사의 트위터에 대한 언론보도도 SNS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는 데 한몫을 했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유행을 탔던 것과 동일한 맥락에서, SNS는 한국에서 선진문물을 대변하는 보편 지식으로 받아들여졌다.

흥미롭게도 한국에서 SNS는 ‘~하다’라는 동사와 결합하는 것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요즘 SNS하시나요?”라는 말이 낯설지 않은 것이다. SNS가 하나의 고유명사로 작동하기에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인데, 이런 까닭에 SNS 문화가 초래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일부 보수언론의 비판도 SNS 기술 자체를 거부할 수 없는 것이다. 일찍부터 인터넷과 SNS를 거짓정보로 대중을 선동하는 괴담의 온상으로 지목해온 보수언론이지만, 그렇다고 이런 기술에 내재한 비인간성에 대해 본격적으로 문제제기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엘리트주의적인 시각에서 SNS를 바라보는 보수언론은 나쁜 SNS와 좋은 SNS를 구분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SNS를 나쁜 것과 좋은 것으로 분리해낼 수 없기 때문에, SNS 활동 자체를 진보나 보수로 규정하려는 시도도 생산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SNS를 지배하는 민주주의는 산업사회의 원리를 구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민주주의가 바로 ‘소비자 민주주의’이다. 소비자의 주권을 주장하는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이른바 후기자본주의라고 불리기도 하는 현재의 자본주의가 문화자본주의로 전환된 까닭도 이런 소비자 민주주의의 개화와 무관하지 않다.

이런 까닭에 SNS가 현재 한국 사회 변화를 보여주는 하나의 현상인 것은 확연하지만, SNS의 영향력을 긍정하는 것만으로 미래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현상에서 ‘소비자’의 의미는 해체하고, ‘민주주의’의 의미는 확대 강화하는 노력일 것이다.

[2012. 1. 10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