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민상-스포츠 룰과 정치의 룰


동문특별강좌 윤민상-스포츠 룰과 정치의 룰

작성일 2010-03-08
▲윤민상(경제87, 한나라당 부대변인, 총동문회 이사)

밴쿠버에서 연일 들려오는 메달 소식에 희열을 느낀다. 비록 메달 획득에는 실패했지만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 그 자체는 큰 감동이다. 경기를 마친 선수들이 태극기를 들고 경기장을 도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흐른다. 2002년 월드컵 때의 ‘대한민국’의 감동이 되살아 난다.

스포츠의 매력은 정해진 경기룰에 따라 공정하게 시합을 해 순위를 매기는 것이다. 결과에 대해 불만도 있고, 항의도 있지만 룰 그 자체가 훼손되는 일은 없다. 간발의 차이로 승리하지 못한 선수는 결과에 승복하고 다음 기회를 위한 분발의 계기로 삼는다.

40대 가장이면서 한 기업의 CEO로서 우리 사회와 국가에 기여하는 길이 무엇인지 깊은 고민을 할 때가 많다. 이는 비단 혼자만의 고민이 아님을 일상에 쫓겨 바쁘게 살고 있는 같은 또래들과의 대화에서 알게 된다.

80~90년대에 대학을 다니면서 국가, 사회 등 공적영역에 대한 고민을 공유했던 기억이 있는 세대의 대화에서는 여전히 정치가 주된 테마이다.

이들과의 대화에서 정치에 대한 혐오에 가까운 실망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청춘을 바친 우리의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며 분개하는 모습도 종종 본다. 기대했던 ‘새로운 피’도 정치개혁과 발전의 초석이 되지 못하고 어느덧 여의도의 논리 속에 동화돼 기성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최근 정치권에 최대의 화두인 세종시 문제는 이 같은 심정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공통된 의견은 정치인들이 국민의 수준을 너무 낮게 보고 있다는 것이다.

국민들은 논리보다는 자극적인 언어로 언론의 주목을 받는 정치인들이 공익보다는 사익을 우선한다는 사실을 안다. ‘세종시’란 단어에 대한 거부감이 팽배해지는 것은 정치인에 대한 혐오와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증대되는 결과로 직결된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민주주의의 위기를 초래한다’는 정치학의 오래된 명구를 상기하면서 정치의 복권(復權)을 기대해 본다.

정치는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고자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인 자연상태의 인간들이 죽음의 공포 속에서 생(生)을 보장받기 위해 타협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통해 욕망의 실체인 개인은 타인과의 상생(相生)을 체득하게 된다.

고대의 전제(專制)체제도 이 같은 정치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속에서 노예의 복종도 생을 선택한 정치행위이다. 지금의 의회민주주의는 주인의 ‘임의(任意)’에 의해 결정되던 노예의 삶이 사회 구성원의 합의인 ‘법(法)’에 의해 정해지는 삶의 질적 변화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의회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은 개개인의 삶과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정치복권의 기본 토대는 의회민주주의의 복원이다. 18대 국회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의회민주주의의 기본인 다수결 원칙이 훼손되고 있다. 다수의 결론이 언제나 타당한 것은 아니지만 소수의 생각보다 우선되는 것은 다수결 원칙이 민주주의의 성과이기 때문이다. 이는 세계역사가 ‘1인 전제정치’에서 ‘수명의 귀족정치’, 그리고 국가의 일원이 된 국민들이 참여하는 민주정치로 발전해 온 것에서 알 수 있다.

인간만사의 종합예술과도 같은 정치의 세계를 밴쿠버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킹 10000m에서 네덜란드 스벤 크라머 선수가 실격당한 것에서 보는 것 같은 엄격한 룰이 적용되는 스포츠와 단순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작은 차이가 있지만 그래도 큰 틀에서 운명을 함께 한다’는 정치의 역할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의 세계가 기능하기 위한 기본적인 룰은 존재한다. 그 요체가 다수결 원칙이다. 세종시 문제도 정치의 룰 내에서 해법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2010. 2. 25 아시아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