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일-한국정치,흥미 혹은 환멸


동문기고 노동일-한국정치,흥미 혹은 환멸

작성일 2007-05-16

[fn시론] 한국정치,흥미 혹은 환멸               

- 노동일(법학77/29회) / 경희대 법대 교수·시사평론가 -

대부분의 주한 외교관들은 우리나라 근무를 무척 선호한다고 한다. 워릭 모리스 주한 영국 대사도 지난해 3년 임기가 끝났지만 1년 연장을 신청해 본국 외교부의 허락을 받은 것으로 보도됐다. 올해 치러지는 한국 대선을 직접 지켜보고 싶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도저히 예측이 불가능한 그래서 어떤 소설보다 더욱 흥미진진한 게임을 외국인이 현장에서 관찰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을 게 분명하다.

“솔직히 말해 한국에 부임한 이후 ‘이번 주는 좀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은 때가 단 한번도 없었다.” 어디 외교관들의 소감만일까. 한국 정치를 조금만 관심 있게 지켜보는 사람에게는 한 주가 아니라 단 하루도 재미 없다는 느낌을 받은 때는 아마 없을 것이다.

하루 1건 식으로 이어지는 열린우리당 탈당 시나리오도 한나라당의 독주로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대선 흥행에 활기를 불어 넣는 요소다. 어제까지 원내대표와 정책위의장 등을 지내며 핵심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오늘 그 당을 헌신짝 버리듯 박차고 나서는 드라마틱한 장면을 다른 나라 어디에서 구경할 수 있겠는가. 자기들이 모시던 주군을 극렬하게 비난하는 모습은 더욱 박진감이 넘친다.

“훌륭한 후보감이었지만 훌륭한 대통령감은 아니다.” “큰 입만 있고 눈과 귀가 없다.” 열린우리당 탈당파 의원들을 대표한 이강래 의원이 ‘노무현 대통령의 15가지 문제’를 지적하며 시작한 말이다. “그런 평가가 있다”는 식으로 에둘렀지만 자기들의 속내를 표현한 말이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가슴 속에 품었던 말들을 쏟아내니 속이 다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고 했을까.

이어진 이 의원의 지적은 여당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던 인사의 말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울 정도다. 반복적인 말 실수, 코드인사, 인재풀의 한계, 언론과의 적대적 관계, 고집·오만·독선·자주를 가장한 탈미적 접근, 당 배제, 편 나누기, 뺄셈 정치, 싸움의 정치 등. 어제까지 오로지 대통령의 뜻을 받들기 위해 수구세력 비판에 분골쇄신하느라 보이지 않던 흠이 오늘 보이는 것일까. 아니면 그동안 참고 참았던 분노를 터뜨리느라 스스로의 말처럼 ‘발길질’을 더욱 거세게 하는 것일까.

흥미를 배가시키는 것은 청와대의 반응이다. 청와대의 시각으로 볼 때 ‘노무현 대통령의 15가지 문제’ 어느 하나도 동의하기 어렵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의원의 거친 말에도 청와대 참모들은 물론 청와대 브리핑은 잠잠하다. 노 대통령을 향한 비판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해왔던 것으로 보아 의아한 생각이 들 정도다. 이른바 보수 언론이나 야당 인사들이 이런 비슷한 말이라도 했다면 즉각 반발이 나왔을 것은 불문가지다. 여당 의원들의 집단탈당이 ‘위장 이혼’ ‘위장 탈당’이라는 일각의 분석은 이런 점과도 맥락이 닿아 있다. “탈당이라는 강물이 대통합의 바다에서 만날 것”이라는 유의 발언도 마찬가지다.

외국인이야 흥미 있는 구경거리가 많을 수록 좋을 것이다. 그러나 어제까지 자기들이 마시던 우물에 서슴없이 침을 뱉는 정치인들의 행태를 단지 흥미 있는 구경거리로 생각할 국민은 많지 않다. 신당을 만든다 해서 그들의 정치적 책임이 세탁된다고 여길 국민은 더 드물다. 하물며 장차 대선 국면에서 대통합을 선언하는 반전극을 연출하기 위해 위장 이혼을 감행했다면 현란한 손짓으로 국민을 기만하는 수법에 불과하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드라마는 흥미를 유발시킨다. 그러나 정치의 지나친 반전은 환멸을 부추길 뿐이다. 탈당파 다수는 2003년 가을, 민주당 집단탈당에 가세했던 인물들이다. 자기들만이 정치개혁을 이룰 수 있다며 백년 정당을 장담하던 이들이 이번에는 ‘3년 정당’을 만드는 데 앞장서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장담처럼 역사적 평가가 호의적으로 바뀔 때 이들이 또 표변해 ‘노무현에 대한 15가지 찬가’를 부른다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또 언젠가 개인적인 이익을 앞세우기 위해 나라와 국민의 이익을 도외시한다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소를 나에게 가져온 자는 훗날 나의 소를 훔쳐갈 자다.’ 위대한 정치가로 여겨지는 루스벨트의 말이라던가. 

[파이넨셜뉴스 2007-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