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의 민족답게 무궁무진하다. 외침으로 기근으로 피폐해진 일상 속에서도 우리 선조들은 보고 듣고 겪은 세상사를 종이에 또 목판에 새겨 놓았다. 한국국학진흥원이 지금까지 수집 보관하고 있는 자료만도 고서 18만4천여 점, 고문서 32만4천여 점, 목판 6만6천여 점, 서화 5천500여 점, 현판 1천300여 점 등 58만5천여 점에 이른다.
정종섭 한국국학진흥원장은 “이 방대한 자료에 담긴 정보와 가치들을 찾아내고 활용 가공해서 우리 삶에 보탬이 되도록 하겠다”고 말한다. 문화유산 보고로서의 대구 경북의 위상을 드높이는 것은 물론 지역 정신의 정체성 확립에도 기여하겠다고 했다.
관 중심 역사 아닌 개인 소상한 기록들
문서·서화· 목판 등 58만5천점 이르러
2030년까지 9년간 단계적 디지털화
지역사회 발전·문화위상 제고 모색도
영남인들은 성찰과 훈련으로 내공 쌓아
정자는 음풍농월하는 놀이장소 아니라
친구와 치열하게 현실을 논의하는 장소
“대구는 수구, 동의 못해 개혁선도 역할”
- 한국국학진흥원장으로 자리를 옮긴 지 1년이 지났다. 주위에서는 아주 적성을 찾아 잘 왔다고 한다.
△학자로서 자기 자리에 온 것 같다. 평생을 학자로 살아왔는데, 현실정치에서 못 이룬 꿈을 이제 후배들이 이룰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것이다.
- 국학원 자료가 방대하다. 수장고에서 평생 햇빛을 못 볼 수도 있는 작품들을 꺼내어 해석하고 이용할 수 있게 하려면 언제쯤 가능할까.
△지금까지의 자료들이 주로 관(官) 중심의 역사인데 진흥원 자료는 현장의 역사와 일기 같은 개인의 소상한 기록들이다. 대학교수에서부터 전문가들이 번역을 지원해주고 있지만 지금의 속도로는 백년하청(百年河淸)이다. 다행히 이철우 경북도지사도 예산 증액을 약속했고 안동시와 경주시가 시 차원에서 협력하고 있다. 앞으로 더 많은 시군에서도 참여하면 시간이 당겨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디지털 시대, 국학 자료도 디지털화는 어떻게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나.
△국학진흥원이 보관하고 있는 58만여 점의 자료를 안전하게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료에 담긴 방대한 정보와 엄청난 가치들이 우리 삶에 이익이 되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4차산업혁명 시대에 대비해 진흥원의 자료 58만점을 국학분야의 인공지능 자동번역시스템 구축 사업을 통해 올해부터 2030년까지 9년간 단계적으로 번역하고 있다. 국학진흥원은 자료의 가치 있는 활용을 위해 우선 고서와 고문서를 스캔해원문 이미지를 제공하고 한문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를 위해 원서를 한글로 번역하여 온라인으로 제공하고 있다.
또 자료에 담겨 있는 다양한 스토리를 발굴, 문화콘텐츠의 원천 소스로도 제공하고 있다.
- 국학진흥원 자료를 활용한 아름다운 이야기할머니 사업은 성과가 대단하다고 한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할머니 사업은 자료들을 이용하고 있는 대표적 케이스다. 2009년 대구 경북의 30명으로 시작한 이야기할머니 사업은 지금까지 연인원 5천명이 교육을 받았고 현재 3천500여명이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다. 유치원생과 대화를 통해 선조들의 지혜를 교육을 하고 있다. 자라나는 미래세대에게는 선조들의 지혜를 통해 인성을 길러주고, 참여하는 어르신들에게는 일거리와 자아실현을 통한 삶의 질을 높여주는 상생 사업이기도 하다. 이야기할머니는 엄정한 심사를 거쳐 선발하는데 은퇴한 교수나 교장 출신들이 몰려들어 최고 기록이 50대 1을 넘기도 한다.
- 정종섭 원장이 부임하고 지난해 7월 한국국학진흥원의 변화와 혁신을 위한 ‘국학 30비전’을 선포했다.
△‘새 시대를 열어가는 문화 콘텐츠 개발에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기관으로 성장하겠다’는 포부와 함께 계승 전문 향유 상생 책임의 기관 핵심가치와 5대 경영목표를 혁신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새로운 원동력을 발표했다.
국학 30비전이란 “Culture, Future, Picture · 문화로 미래를 그리다”는 슬로건이다.
문화는 국학 자료의 연구를 통한 한국문화의 새로운 원형을 창출하고, 미래는 국학 자료의 보급과 활용으로 미래를 선도하며 한국적 가치를 교육을 통해 문화국가 실현에 이바지한다는 거창한 비전이다.
- 국학진흥원의 현안은 무엇인가.
△지금까지는 자료 수집에 전력을 기울였다면 앞으로는 이들 자료를 활용해 그 결과물을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다.
소장자료 중 가치가 높은 것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을 비롯해 국가문화재에 등재시킴으로써 경북의 문화적 위상을 제고하겠다.
유교책판과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고 국보 징비록을 비롯해 전체 자료의 12% 정도를 문화재로 지정시킨 경험을 갖고 있다.
- 국학진흥원의 30비전을 보니 정 원장의 행정자치부 장관 시절 추진한 국가대개조론이 연상된다.
△세월호 참사 이후 국가는 모든 분야에서 총체적 위기 상황이었다. 나는 김영삼 정부 시절 30대 학자로서 국가설계를 한 적이 있다. 장관 취임 이후 정치 사회 경제 정부 전 분야의 대개조를 통해 정상적인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자 했다. 그러나 뜻대로 안 됐다. 결과적으로 실패한 정치인이 됐다.
-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정책을 지지해주지 않았나.
△박 대통령은 국가 개조에 대한 소신이 분명히 있었던 것으로 안다. 4대 공공개혁은 시대적 소명이었지만 정치적인 고려를 한다면 결코 추진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대단하게 결심을 했다. 강성 개혁론자인 나를 불러냈고 나도 소신대로 장관직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원하는 결실은 끝내 얻지 못했다.
-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학자로서의 이론이 현실 정치와 괴리가 있기 때문이다. 학자는 이론적 근거만으로 주장하고 비판하지만 실제 자기실현까지는 책임질 필요가 없다. 그런데 정치인이 돼 현실에 적용하려니 정부 모든 부처가 생각을 같이 해야 하고 공무원들이 인식을 같이하고 움직여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다.
- 그 때 대통령제의 개헌 필요성이 나오기도 했다.
△나는 옛날부터 대통령제의 폐단이 심각함을 지적해왔다. 김영삼 정부 때부터 문민정부는 기대만큼 국민들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고 정상적인 국가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대통령이 모든 것을 하고 대통령의 의지가 헌법 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권력이 헌법 위에 있으면 국가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국가 기관의 일은 모두 헌법에 규정돼 있는데 권력이 ‘내가 하겠다’고 나서면 법의 지배가 아닌 권력의 지배가 된다.
우리는 ‘역사에 남을 대통령이 되라’고 요구하지만 인간에게 호소해서는 실효성이 없다. 물러가는 대통령을 향해 비난하기는 쉽다. 그러나 남은 국민은 뭐가 되나. 국민들의 행복은 누가 책임지나. 이런 방식의 비난과 요구가 반복되는 것은 모두 대통령제에서 기인한다. 제도로 정상화시켜야 하고 그것은 개헌을 통한 개조여야 한다.
- 결국 국가의 정상화는 대통령제를 바꾸는 개헌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보는 것인가.
△대통령제의 폐해는 너무 많다. 대통령은 ‘정치적 중립’을 요하는 5대 권력기관에 자신의 핵심을 임명함으로써 오히려 ‘정치적’으로 만들어 버렸다. 대통령이 ‘수사’를 지시하고 수사기관이 무리한 수사를 함으로써 최종심에서 무죄가 나오는 사건이 생겨나기도 했다.
80년대 말 학자로서 대의정치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참여민주주의를 제안했다. 그러자 노무현 정권에서 컨텐츠를 도용하고 이름까지 ‘참여정부’라 했다. 그러나 진정한 참여는 좌파나 우파만의 참여가 아닌, 전 국민의 참여여야 하는데 자기들만의 참여정부가 돼 버린 느낌이다.
헌법 개정을 통해 내각제로 가거나 대통령 직선 내각제로 바꾸는 것이 해법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국민적 합의를 거쳐 결정해야 한다.
- 장관으로서 모시던 대통령이 탄핵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이후 당시 국무위원으로서 공동 책임을 져야 한다며 모두 사표를 쓰자고 제안했었다. 동의하는 동료도 있었지만 반대자도 있었고 혼자만이라도 실행하기에는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때 (임기 3년이상 남은) 국회의원은 그만 하기로 결심했다. 그렇지만 당장 (재선 불출마를) 공개할 수는 없었다. 선거 막판까지 ‘끝까지 나간다’고 했지만 불출마는 탄핵 후 바로 결심했다. 더 이상 국회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헌법 개정은 무산됐고 선거법과 정치자금법을 고치려던 정치개혁도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 학자로서 정치계에 뛰어들었다. 국회의원 시절 원칙대로 했나.
△국회의원은 국가의 대표로 국민 전체의 이익을 대변해야 하는데 지역의 대표는 아니다. 그런 현실 속에서 갈등은 있었지만 살아온 철학만큼은 한 길이었다고 자부한다.
공항이 내 지역에 위치하는 것보다 다른 지역이 국가 이익에 부합한다면 그렇게 주장해야 하는 것이 헌법의 원리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지역구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이 상충된다면 국가의 이익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대구 동구의 숙원사업을 위해 확보한 예산이 국가 전체로 보면 다른 지역에 지원돼야 할 예산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 “정치인의 말은 절대로 믿지 마라”는 말도 있다.
△정치인으로 일부러 거짓말을 해야 할 때도 있고,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해야 할 때도 있다. 정치인이었던 때 나도 그랬다.
- 국학진흥원 자료를 통해 본 영남인의 정신은 어떤 것인가.
△영남 남인들이 권력에서 배제돼 있는 동안 끊임없는 성찰과 훈련을 통해 내공을 쌓았던 것이다. 국학진흥원 자료를 보면 이 지역에 많은 정자는 시가로 음풍농월하는 한가한 놀이 장소가 아니었다. 치열하게 현실을 고민하고 친구를 찾아 함께 논의하는 장소였다. 특히 영남 남인들은 출사에서 봉쇄된 상황에서 지식 탐구와 논쟁을 통해 지금 우리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음을 발견하고 놀랐다. 특히 영남의 본거지 대구를 ‘수구’로 몰거나 ‘뒤쳐졌다’고 하는 비난에는 동의할 수 없다. 오히려 개혁의 선도자였다. 역사적으로 나라가 어려울 때 항상 시대정신에 앞장선 것이 이 지역민이었다.
특히 영남인의 치열했던 삶은 이 지역 선조들의 독립운동에서도 두드러진다. 당시에도 외국 유학으로 새 시대를 개척했던 사람들과 달리 전답을 처분해서 일가족이 만주로 이주해 간 독립운동가들은 시대의 문제를 자기문제화 해서 역할을 마다 않고 앞장섰던 선각자들이었다. 그들은 퇴계의 학통을 이은 유림들이었다. 그들의 치열한 삶을 보면 결코 수구꼴통이 아니다. 지금 국학진흥원 자료를 근거로 영남의 정신을 다시 부흥하는 운동이라도 펴야 한다.
- 지금 국학진흥원장이라는 학자의 길로 다시 왔다.
△공부를 왜 하느냐고 물을 때는 유학의 퇴계와 율곡의 삶을 대비해서 이야기한다. 율곡은 자신의 안위보다는 국가를 위해서라면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몸을 던진 것이다. 반면 퇴계는 현실과는 거리를 두고 자신의 완성으로 세상을 감화시키려 했다. 제자를 출사시켜 현실 정치를 개혁하려고 했던 것이다. 징비록을 몇 페이지만 읽어도 “이게 나라냐” 하는 화가 치민다. 그러나 서애는 욕을 먹으면서도 자리를 지켜가면서 이순신을 발탁해 나라를 구해냈다.
젊은 시절 평생을 학자의 길을 가겠다고 작정했는데 국가 개조를 작정하고 현실 정치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했다. 지금 청량산을 걸으면서 ‘퇴계의 길로 갔어야 했나’ 자문해 보기도 한다.
정종섭(鄭宗燮) 한국국학진흥원장
경주, 경북고, 서울대 법대, 경희대 법학석사, 연세대 법학박사.
헌재 헌법연구관, 서울대 법대 교수, 서울대 법대 학장, 법전원 원장.
헌법학원론 등 저서 62권
국회의원, 행정자치부 장관.
대의 민주주의를 전공한 헌법학자, 관련 저서만도 65권이나 된다.
학계에서 현실 정치를 따갑게 비판했다. 참여민주주의를 처음으로 역설했고 책임총리제와 특별검사제를 제안했다.
정치권에 들어와서는 대통령제 폐지 헌법개정과 정치개혁 등 자신의 국가개조를 뜻대로 이루지 못했다.
/이경우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