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특별강좌
서하진-야구에 열광하는 이유
< 야구에 열광하는 이유 >
--- 서하진 (국문79, 31회) ---
수년 전 겨울, 계절 학기 강의를 맡은 일이 있었다. 개강 첫날, 강의실 뒤에서 남학생 하나가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왔다. 키가 크고 턱이 긴, 잘생긴 청년이었다. 그 학생이 조그마한 꾸러미를 내밀었는데 거기에는 ‘홍성흔’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야구공 하나와 미니 야구배트가 들어 있었다.
뭐냐, 물었더니 그 학생이 이랬다. “야구선수입니다.” 학점을 따지 못하면 졸업을 할 수 없고 그렇게 되면 이미 결정된 프로 팀으로의 입단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꼬박꼬박 수업을 들어올 수는 없다는 그 학생에게 나는 “팀은 어디냐, 포지션은 무어냐”고 물었다.
두산, 포수라는 답이 돌아왔다. 두산은 내가 응원하는 팀의 강력한 경쟁자였고, 포수는 내가 특히 좋아하는 보직이었다. 고민 끝에 나는 비교적 후한 점수를 매겼다. 그 학생이 이만수, 장채근, 김무종, 유승안의 뒤를 잇는 훌륭한 포수가 될는지 누가 알았겠는가. 어제 애너하임에서의 경기가 끝나고 더그아웃에 있다 튀어나온 선수들 가운데 유난히 턱이 긴 한 선수가 있었으니! 대한민국 야구 발전에 작으나마 일조한 듯 뿌듯해진 순간이었다.
차영화라는 선수가 있었다. 광주일고 재학 당시 2루 철벽 수비수였던 그를 지금껏 기억하는 것은 내 친구 때문이다. 그 친구에 따르면 전날 경기에서 차영화가 어깨 위로 날아가는 공을 미처 미트를 갖다 댈 틈이 없어 맨손으로 잡아냈다나.
경북고의 팬이었던 나는 당연히 그 친구의 말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을 떠나던 그 친구가 차영화에 관한 기사 스크랩이 빼곡히 든 상자 하나를 남겼다. 나는 차영화가 이제껏 존재했던 최고의 내야수이며 앞으로도 나올 모든 선수는 그에게 빚질 것이라는 그 친구의 견해를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야구장 가자고 하면 친구들은 그런다. 나 야구 잘 몰라. 내가 가르쳐 줄게, 하면 세 시간을 어떻게 앉아 있느냐고 한다. 끈질기게 조른 끝에 “내가 봐준다” 하는 표정으로 따라나선 친구일수록 곧바로 연락을 해온다. 야구장 안 가느냐고.
파울 플라이인데도 벌떡 일어나 환호를 질러보고, 저걸 스트라이크 안 주다니 저 심판 눈이 있나 없나, 분개하다 보면 푸른 잔디가, 하얀 공이, 젊고 활기 찬 선수들이 통째로 눈에 들어오는 때가 있다. 어쩌면 하나의 경기에, 이토록 많은 경우의 수가 있는 것일까, 감탄이 절로 나오는 때가 반드시 오고 그때 야구는 소중한 위안, 좋은 친구로 다가온다.
알렉스 로드리게스니, 무슨 주니어니 하는 이름조차 거창한 근육질의 선수와 마주 서 있는 조그마한 체구의 동양 투수. 그러나 그 누구에게도 18.44m의 거리는 동일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또한 유쾌해진다.
경기에서 뜻밖의 상황이 전개되면 해설자들이 단골로 하는 말이 있다. “이게 야구예요.” 왜 야구를 좋아하느냐고? 이진영의 송곳 송구, 바위가 떨어져도 꿈쩍 않을 듯한 오승환의 입매, 예전에도 저리 귀여웠나 싶은 승엽의 동그란 눈, 어쩜 저리 한국식 억양을? 싶은 찬호의 인터뷰,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무표정한 김 감독님… 이런 모든 요소 때문에. 그러나 이런 것들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야구에 열광한다. 왜냐하면 야구니까.
- Copyrights ⓒ 조선일보
* 소설가 서하진에 대해
▲1960년 경북 영천 출생
▲경희대 국문학과 79학번, 31회
▲동대학원 석사·박사
▲1994년 ‘현대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제10회 한무숙 문학상 수상
▲작품 ‘책 읽어주는 남자’, ‘라벤더 향기’, ‘사랑하는 방식은 다 다르다’,‘비밀’,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