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기행(12)


동문특별강좌 인도기행(12)

작성일 2005-02-19

< 生과 死가 교차하는 힌두聖地 바라나시 >

(이윤희, 사학21회, 문학박사·서일전문대학 교수)

-------- 회초리를 든 소년을 따라 다니는 수십마리의 검은 물소들, 검은 물소들이 웅덩이 같은 연못에 고인 물 속에서 한나절 여름을 첨벙거리며 즐기고....

어제 종일 뉴델리의 국립박물관, 라지가트의 간디 묘, 네루 기념관, 네루 도서관, 델리대학을 찾아보고 바라나시 기차표를 구하는 등 피곤했던 탓인지 곤한 잠에 빠져있었다.
새벽 5시 전화 벨이 울렸다. 벨소리로 깨워 주는 것이다. 잠시 후 다시 벨소리, 굿모닝 하며 조반은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는다.
인도의 수도 뉴델리의 기차역은 다른 역에 비하면 그래도 번듯한 편인데 더럽고 고약한 냄새가 짙게 깔려 있었다. 15량으로 거멓게 늘어선 기차 밑 레일위로 널려진 온갖 오물에서 고약한 악취가 풍기고 있는 것이었다.
인도를 세 번째 왔지만 기차여행은 처음이었다. 좌석을 찾는데 긴 기차를 왕복하며 헤매다 마침내 기차에 오르는 입구에 붙여논 승객 명단에서 확인한 후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좌석을 찾아갔더니 내가 앉아야 할 의자 앞에 커다란 궤짝이 꽉차게 놓여 있었다. 당연히 궤짝을 치워야 앉아갈 수 있는데 앞 좌석의 청년은 마주보는 좌석은 자신의 자리이고 그곳에 짐을 놓을 수 있으니 짐위에 발을 올리고 가면 된다는 것이다. 의자보다도 훨씬 높게 놓여진 궤짝위에. 막무가내로 떼를 쓰는 그 청년에게 화는 났지만 점잖게 앉아가야 되지 않겠느냐며 궤짝을 옮기도록 말했다. 결국 짐은 다른 곳에 옮겨지고 자리에 앉아 정상적으로 발을 내리고 갈 수 있었다.
앉아서 자세히 보니 삼성 텔레비전 상자였다.
호기있게 상자를 비켜주지 않겠다고 호언했던 그 청년은 내리고 아무리 보아도 좀더 시골티가 나는 그의 동생인듯한 청년과 그의 어머니만 함께 여행하게 되었다. 영어가 어느 나라에서보다도 잘 통하는 인도에서는 특이하게 생각될 정도로 이 두 사람들과는 의사소통을 할 수가 없었다. 이두 사람은 내린 청년이 사준 텔레비전을 애지중지 바라보며 흡족해 하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언뜻 상자의 삼성 마크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은 그 크고 튼튼한 텔레비전 박스를 더럽히지 않게 또 다른 종이로 덮어 씌워 놓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의 상품이 인도에서 이들에 의해 높이 대접받고 있는 것이 흐뭇하고 자랑스러웠다. 인도의 도시를 돌아다닐 때 가끔 인도인들이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는 듯 대우자동차의 시에로를 타고 다니는 것을 볼 때도 나는 똑같은 흐뭇한 마음을 느끼곤 하였다.
아침 6시 30분, 기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침햇살이 창문을 통해 들어온다. 기차는 부드럽게 달리는 것 같은데 속도를 내지 못한다. 냉방가동이 잘 되어 천정의 철재 선풍기는 한가롭게 매달려만 있다. 좌석은 침대로 만들어 편한자세로 휴식을 가질 수도 있다.
바라나시까지는 13시간 30분 소요된다고 한다.
여름철 우기인데도 사흘동안 비한방울 구경하지 못했다. 도처에 초목은 푸르고 싱싱하게 덮여 있다. 경작된 것은 주로 사탕수수와 옥수수다. 군데군데 사탕수수를 많이 베어내고 있다. 한시간 가량 속도없이 느릿느릿 하던 기차는 느렸던 속도를 만회하려는 듯 상당히 빠른 속도로 달려주기 시작한다.
건너편 좌석의 인도 여자는 의자 밑에 두 개의 큰 가방에다 세파트나 토사견을 끌고 다닐 때 쓰는 튼튼한 쇠고리로 두 가방을 연결하여 묶어 놓았다. 하기야 꽤 큰 가방이지만 하나쯤은 나도 옮길 수 있을 것 같지만 저 쇠고리로 연결된 가방 두 개를 누가 둘러메고 튈 수 있겠는가!
황량한 벌판에 비가 내린다.
델리에서 동서남북 어디로 가든 천리길 안으로는 산하나 없다더니 가도가도 끝없는 평야로만 이어진다. 세차게 때리던 빗줄기가 금방 가늘어진다.
기차가 멈춘다.
영국지배 아래서 대폭동(세포이 발란)이 일어나 외국인을 닥치는 대로 무자비하게 학살했던 지역 깐뿌르 역이다. 꽤 큰 역인 듯 사람들이 붐빈다. 다른 역에서는 스는 듯 마는 듯 하고 출발했지만 깐뿌르 역에서는 제법 지체할 듯 싶어 얼른 내려가 감자튀김과 바나나를 사 들고 차에 올랐다. 인도 바나나는 현지에서 숙성된 열매를 조달 판매할 수 있어서인지 맛은 훨씬 달콤하다.
아침부터 구름은 어두운 색으로 하늘을 가리더니 비는 내리다 그쳤다 한다. 거의 벌거벗은 까맣게 마른 체구의 인도인들이 일렬로 늘어서 보내기 하는 모습이 보인다. 갠지스 강이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옛날과 달리 논농사가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인도는 대부분의 지역이 매말라 논농사가 불가능 하지만 큰 강이 흐르는 부근에는 곳곳에 드넓은 경작지가 형성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소가 많이 보인다.
하얀 황소를 몰고가는 검은 인도인, 주인없이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하얀 암소떼들, 회초리를 든 소년을 따라 다니는 수십마리의 검은 물소들, 검은 물소들이 웅덩이 같은 연못에 고인 물 속에서 한나절 여름을 첨벙거리며 즐기고 있다. 기차 안은 에어컨 성능이 너무 좋은 탓인지, 창밖의 비로 대기의 온도가 낮아져 버려서인지 추워져 버렸다. 담요를 어깨에 둘렀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다.
인도여행은 유럽여행과 달리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아는 나는 적잖이 걱정도 되었다. 찾아간 지역에 대한 여행정보가 전혀 없이 바라나시에 1시간 정도 연착하여 밤 8시40분 도착했다. 바라나시역에서 여행객인 서양 젊은이에게 숙소형편을 물어 보았더니 정부가 운영하는 투어리스트 방갈로가 역에서 1∼2분 거리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영어에 능숙한 젊은 인도 청년이 다가와 친절하게 스쿠터로 투어리스트 방갈로를 권하기에 정부가 운영하는 방갈로로 가겠다고 했는데 스쿠터로 3∼4분이 지나도록 자꾸만 가는 것이 아닌가!
바라나시는 힌두 최대의 성지로서 인도의 방대한 지역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유치하기 위해서도 숙박시설은 많을거라는 짐작이 갔다. 내가 탄 스쿠터의 운전기사는 정부가 운영하는 투어리스트 방갈로가 아닌 일반 숙소로 안내하는 듯 싶었다. 날은 어두워져 버렸지만 다행히 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어서 내려서 다시 걸으며 몇 사람에게 물어 투어리스트 방갈로를 찾았다. 역에서 1∼2분 거리가 맞았다. 현지에서 호객에 열올리는 인도인들은 대부분 믿을 수 없다는 사실, 유럽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지만 외국을 여행중에는 방문한 나라의 사람들 보다도 외국인 여행자에게 여행정보를 알아보는 것이 훨씬 유익할 때가 많다.
건물 안의 프론트 데스크에 이르렀다. 비어있는 방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난감해 하자 잠시 기다리라며 다시 확인하더니 방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 방갈로에서 제일 좋은 방으로 냉방장치가 되어있는 방이라고 했다.
안내된 방의 문에는 모기들이 수백마리 시커멓게 붙어 있어 문을 열면 방안으로 날아 들어갈 것 같았다. 모기약을 가져와 문에 뿌려 모기를 날려 버린 후 얼른 들어갔는데도 몇 마리가 금새 들어와 버렸다. 다시 방안에서 모기 퇴치를 한 후 아예 모기약을 뿌리면서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방갈로의 정원에 켜진 보름달 같은 전등 주위에도 모기들이 불빛을 흐리게 만들고 있었다.
갠지스강 중류에 있는 바라나시는 힌두교의 대표적인 성지이다. 길거리에는 마차와 자동차 인력거와 인파로 북적거리고 숭배의 대상으로 대접받는 유난히 많은 소들이 느릿느릿 걸어다닌다. 미로처럼 좁은 골목길엔 聖牛들이 내놓은 오물 냄새, 매캐한 향 냄새, 카레 냄새로 진동한다. 황금사원엔 맨발에 굶주린 사람들도 떼지어 걸어 들어가고 항아리를 성수로 가득 채운 순례자들도 신을 경배하기위해 걸어 들어간다.
히말라야 만년설에서 시작되어 굽이굽이 벵골만까지 2천4백킬로를 흐른다는 갠지스강은 시바神이 은하수를 히말라야로 흘러 내려 생겼다는 신화를 갖고 있다. 신앙심이 깊은 힌두교도들이 하계를 향해 물방울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물방울의 힘이 어찌나 센지 세상 전체가 물바다로 되었다. 이것을 본 히말라야에 있는 시바神이 머리카락으로 그 물을 받아 다시 조그맣게 잘라서 하계로 흘러보내니 이것이 갠지스강이 되었다는 것이다.
바라나시는 시바神이 목욕을 했던 곳으로 전해져 그래서 더욱 <죄를 씻어 주는 강> 힌두교의 성지로 인식되어 있다.
힌두교는 어느날 갑자기 만들어진 인위적인 종교가 아니다. 힌두교는 인류가 갠지스강 유역에서 문명을 이루어 낸 때부터 신화와 전설 속에 성장해온 민속적인 신앙으로 다신교다.
인도에는 힌두교, 이슬람교, 조로아스터교, 불교, 기독교등 수많은 종교가 있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오늘날 인도에서는 겨우 명맥을 유지할 정도로 거의 자취를 감추고 오히려 아시아 각 지역에서 발전해 가고 있다. 인도에서의 종교는 생활에 깊이 침투되어 있어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대립으로 1947년에는 이슬람교도가 인도로부터 분리하여 파키스탄을 형성하였다.
이들 여러 종교 중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것이 힌두교다. 힌두교의 대표적인 三神은 우주를 창조한 브라마, 질서의神 비슈누와 파괴의神 시바이다. 이 삼신을 중심으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신들이 인도에는 존재한다.
힌두교도들은 헐벗고 굶주린 비천한 신분에도 자족하며 착하게 살다 그대로 죽어가면 윤회의 세계에서 그들이 원하는 더 높은 카스트로 재생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 이와 반대로 계급에 걸맞지 않는 욕심을 갖게 되면 다시 태어날 때 더 낮은 계급으로 태어난다고 믿고 있다.
바라나시를 감싸듯 흘러가고 있는 갠지스강에 와서 해뜰 때 聖水로 목욕하면 내세를 기약받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들이 속죄와 재생을 위해 이곳으로 몰려오고 갠지스강에 자신의 재를 띄워 보내는게 최후의 최대의 희망이기 때문에, 한번은 꼭 찾아와야 하는 이곳은 속죄의 강이고 어머니의 강이었다.
바라나시의 갠지스강 언덕에는 수많은 집들로 꽉 차 있는데 그 가운데 유별나게 커 보이는 건물들이 있다. 우다이뿔·비하르·나그뿌르등 여러 지역의 마하라자(토후· 왕)들이 이곳 성지에 별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일년중 어느 한 기간이나 특별한 종교축제가 있을 때 와서 머무는 곳이었다. 그 별장들이 갠지스 강을 내려다 보고 듬성듬성 세워진 채 남아 있었다.
우산과 같은 천막 속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브라만들인데 그들 역시 남자들은 한 부분만을 가리고 벌거벗은 채로 앉아 있었다.
강변의 가트(갠지스강 성수에 접근하게 되는 계단)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다. 일출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멀리 지평선에 붉은 기운이 돌고 덩싯하게 떠오르는 아침 햇살로 갠지스강이 물들자 경건한 자세를 취하며 감격의 목소리와 몸짓으로 그들의 신을 찬미하고 노래를 불렀다. 중얼중얼 기도하는 사람, 계단이나 가부좌를 튼 자세로 앉아있는 사람,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강물에 들어가 물속에 머리를 쳐박고 있는 사람, 필요한 부분만을 가리고 반라의 모습으로 온통 강물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나에겐 흙탕물로 보이는 갠지스 강물이 그들에겐 聖水였다. 삶의 행복과 불행의 절대적인 요소가 돈과 합리적인 사고만은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갠지스강 나룻배에 몸을 싣고 강물따라 흘러가면서 흙탕물을 몸에 바르고 목욕하고 빨래하고 그 물을 성수라고 마시고 항아리에 담아가고 화장터에서는 붉은 화염과 회색 연기속에 한 인간의 짧은 생애의 온갖 욕망과 추억들이 허공에 흩어지며 재로 변하는 것을 바라볼 때 도대체 인간의 삶과 죽음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 1998년 1월 (112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