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특별강좌
인도기행(2)
<인더스 문명의 유물이 돋보인 국립박물관>
이윤희(사학21회. 문학박사. 서일전문대교수)
-- 유럽의 유수한 박물관 미술관을 찾아다니며 수많은 조각과 미술품을 보아 왔지만 인도의 것은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에로티시즘의 본산지는 인도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
국립박물관으로 가는 길은 드넓게 펼쳐진 6차선으로 길 양쪽엔 아름드리 가로수의 행렬이 시원스런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인도는 칠팔월 우기를 제외하고는 극히 적은 강우량인데도 숲엔 나무가 풍부하게 어루러져 있었다.
델리(올드델리)는 천년이 넘는 오랜 도시로서 지저분한 곳이 많지만 잇닿아 있는 뉴델리 거리는 아무리 보아도 그렇게도 잘 정돈되고 여유있고 멋있는 도시 일수가 없다. 얼핏 델리가 인도의 정치적 중심지로 연상되지만 약 200년 동안 영국의 식민통치를 받은 때의 영영(英領)인도의 수도는 칼카타였다. 영국 총독정부가 새로운 도시계획에 따라 뉴델리를 현대적인 도시로 신설한 것은 인도가 영국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하기 전 불과 30년 전이었다.
차도가 넓을 뿐만 아니라 길가에 보도라고 할 수 있는 공간은 적어도 3차선 이상은 될 수 있는 넓은 곳으로서 그 위에 100년 묵은 큰 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그 옆으로 매우 고급스러워 보이는, 아라비안 나이트 동화 속의 하얀궁전과 같은 저택들이 줄지어 자리잡고 있는데 대지가 천평정도는 보통이고 가끔 이삼천평 규모의 저택들도 보인다. 한국대사관도 10여년전 대사관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거리에 현내의 대사관 건물을 짓기 전에는 이러한 큼직한 저택을 하나 빌려서 대사관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국립박물관에 도착하기 전 인디아 게이트를 지나는데 여기에서 인도 중앙청을 멀리 바라보는 이곳은 내가 어느 곳에서도 아직 못 보았던 광활한 광장이었다. 일직선으로 뻗은 넓은 도로 앞편에 드넓은 잔디밭이 조성되어 있고 드문드문 나무도 들어서 있다. 이 광장은 어림잡아 우리의 여의도 광장의 열 배도 훨씬 더 넓어 보이는 규모로 만들어져 있다. 유럽 사람들도 넓은 잔디공원을 꾸며놓고 공놀이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지만 그것과는 비교될 수 없는 대륙적인 엄청난 규모의 광장이다.
뉴델리의 거리를 달리다 보면 수많은 네거리를 지나면서도 신호등이 없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진다. 상가의 복잡한 거리에는 교통 신호등이 설치되어 있지만 뉴델리의 전원 풍경의 주택가를 달릴 때는 네거리에 신호등은 없고 둥그렇게 돌아가는 로타리로 되어있다. 사방에서 달려오는 차들이 로타리에 접어들면서 서로 충돌할 것 같아 조마조마하게 느껴지지만 그러나 의외로 충돌은 없고 신속하게 빠져나간다. 이런 로타리로 되어 있는 네거리 혹은 오거리에는 사고율이 훨씬 적다는 것이다. 양보운전의 결과다. 모든 것이 복잡하고 무질서하게 정돈되지 않은 것 같아 보이면서도 나는 보이지 않는 인도인들의 질서의식을 여기서 찾을 수 있다고 느껴졌다.
박물관 1층에는 세계 문명 발상지 가운데서 가장 그 범위가 넓었던 인더스 문명권의 유적이 풍부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인더스 문명은 인류가 살아 온 장구한 세월 속에서 보면 오직 유물에 의해 인류의 발자취를 더듬을 수밖에 없는 기나긴 선사시대를 지난 후 였다. 인더스 문명이 출현한 때는 청동기 시대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이미 1857년에 철도부설공사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된 인더스 문명의 유적은 영국인 고고학자 존 마샬의 지휘로 1920년에 발굴이 시작되었다.
인더스 문명은 기원전 약 3000년 전부터 B.C 1500년까지 약 1500년 동안 훌륭한 도시 문명을 이루다가 몰락하고 말았다. 인더스 문명의 대표적인 유적인 모헨조다로나 하라빠 모두가 인더스 강변에 위치해 있었다.
특히 붕괴되었다가 재건되기를 일곱 번이나 반복했던 모헨조다로는 <죽음의 언덕>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수차례의 홍수로 인한 인더스 강의 범람 때문에 모헨조다로 사람들은 어디론가 이주해 버리고 주인을 잃은 도시는 폐혜와 사막의 회오리 바람속에 매몰되어 버린게 아닐까?
전시된 모헨조다로 유물로는 사람모양 조각, 오늘날 사용하는 것과 모양이 비슷한 후라이펜, 타버린 밀, 농기구, 손톱만한 그릇, 짐승, 그릇의 축소품, 동으로 된 칼, 도끼, 꼬장이류 등이 있다. 이곳에서 발굴된 도장 종류는 그 크기가 손톱만한 것에서 명함보다 더 큰 크기까지 다양하였다. 그림도 그려 있지만 분명히 문자가 기록되어 있는데 다른 고대문명 발상지 즉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및 중국의 고대문자는 모두 판독이 되었는데 인도의 경우 많은 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판독이 안된 상태이다.
하라빠 유물로는 짐승, 사람 모습의 작은 모형, 접시, 항아리, 질그릇 종류가 많았는데 아주 작고 정교한 항아리, 팔찌, 반지, 목걸이, 염주와 같은 장신구, 작은 도장류 등이 매우 섬세하게 만들어져 있다.
특히 인도의 국립박물관은 간다라 미술의 보고(寶庫)였다. 간다라 미술은 인도 불교미술과 그리스 미술이 융합된 형태이므로 인도 그리스 미술 혹은 그리스· 불교 미술이라고도 불린다. 이 미술은 한 마디로 그리스의 미술 기법이 불교미술에 영향을 주어 예술적 성공을 거둔 것이다.
인도의 다른 조각들이 웅장하고 정신적인 표현을 시도하여 이상적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간다라 조각은 인체를 아주 섬세하고 아름답게 표현하여 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사람의 얼굴, 윤곽, 수염, 머리카락, 옷자락의 주름살을 아주 세밀히 표현해 놓고 있다. 석가모니의 생애를 조각으로 나열해 놓은 것도 훌륭해 보였다.
간다라 미술은 그리스에서 빌려 왔지만 어디까지나 그 내용은 인도 정신을 나타낸 것으로서 불교신앙을 표현하고 있다. 간다라 미술가는 그리스인의 손을 가졌으나 마음은 인도인의 것이었다. 간다라 미술의 영향은 극동에까지 미쳐 중국· 한국 및 인도의 미술에서 그 뚜렷한 자취를 찾을 수 있다.
일찌기 알렉산더 대왕의 인도 원정이 동서 접촉의 길을 열어 주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헬레니즘 세계와 인도 사이의 문화적 접촉을 2세기 동안이나 지속시켜 왔던 것은 알렉산더 대왕의 인도 원정 후에 건립되었던 국가들 즉 파르티아와 박트리아를 통해서 였다. 특히 페르시아와 인도 서북지방 사이에 자리잡고 있던 박트리아에 이주해서 살고 있던 그리스인과 인도 쿠샨왕조의 불교도들이 서로 접촉하여 이루어 낸 미술이 훌륭한 간다라 미술로 나타났던 것이다.
박물관 한쪽에는 붉은 돌로 「재물의 신(神)」을 조각해 놓았는데 배가 엄청나게 둥글게 튀어나와 있었다. 재물과 튀어나온 배와 연관이라도 있다는 뜻인가?
중세 초기에 들어오면 석질도 떨어지고 조각이 조잡한 느낌이 들었고 중세 후기에 이르면 전체적으로 조각의 분위기가 정교해지고 검은 돌을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여인들의 가슴을 풍선처럼 부풀려 강조해 놓고 히프와 허벅지는 풍만함의 상징 그 자체였다. 그 가운데 허리는 가늘고 잘록하게 처리해 놓고 있었는데 여인들이 몸을 뒤틀고 있다든지 애무 장면등이 거리낌없이 조각되어 있어 아찔하였다.
유럽의 유수한 박물관 미술관을 찾아다니며 수많은 조각과 미술품을 보아 왔지만 인도의 것은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에로티시즘의 본산지는 인도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중세 힌두왕국관에는 검은 쇠로 한결같이 조그맣고 아주 정교하게 만든 힌두 신상이 조각되어 있었다. 손가락이 18개인 신, 완전히 발가벗은 신, 다리를 올리고 춤추고 있는 신등 재미있게 구경하였다.
아쌈지방의 유물은 나무 조각이 많았고 남성의 상징적인 부분을 아주 크게 강조해 놓고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박물관 2층에는 인도의 그림 라가발라로 가득하였다. 몇 개의 전시실에서도 커다란 그림은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다른 나라들의 그림 크기와 기법을 생각하고 있다면 의아스러울 정도의 느낌을 갖게 된다. 몇 발자욱 떨어져 보면 색채가 느껴질 뿐 무엇을 그렸는지 알아 볼 수가 없을 정도이다.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아야 한다. 세밀한 묘사와 섬세한 색채를 통하여 인도인들이 갈망하는 정신세계 속의 온갖 이상향이 담겨져 있는 듯 보였다. 그래서인지 인도의 그림들은 크지 않다. 크다고 해야 대학노트 두배 정도 되는 크기이다.
박물관에서 인도 그림과 책 두 권을 사 들고 밖으로 나왔다. 한 시간을 기다리기로 한 어젯밤 그 운전기사는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두 시간을 넘어 박물관에서 나왔으니 그럴밖에. 다른 택시로 인도의 대표적인 서적 총판을 하는 UBSPD엘 들렸다.